7080 교복 세대들은 기억할 것이다.
“야! 거기 호꾸 푸르고 있는 놈들 앞으로 튀어 나와!” “야! 선생님 오신다! 호꾸 채워라!”
그림. 1970년대 교복과 1950년 포항전선 학도의용군으로 자원한 학생들의 교복.
7080 세대들이 입었던 교복은 검은색의 바지와 함께 검은 웃옷, 그리고 군인 스타일의 교모(校帽)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7080교복은 왜 군인 스타일로 만들어지고, 군인들이 쓰는 챙달린 교모를 썼을까?
육군과 공군사관생도들은 왜 7080 교복과 비슷한 정복을 입고 다닐까?
이들이 입는 옷에는 왜 두껍고 불편한 카라(collar)가 목에 붙어있고, 어개에 붙은 견장은 왜 달렸을까?
모자 챙에 붙어 있는 턱끈은 왜 턱끈일까?
오늘은 이것들에 대해 알아보자.
1983년 2월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교복자율화가 이루어지기 까지 이 검은색 교복은 우리나라의 20세기를 같이 했다.
원래 이 중고등학생의 교복은 “学ラン(がくらん, 学蘭) 가쿠란 = 詰め襟(つめえり) 츠메에리”라고 불리우던 일본에서 유래한 남학생용 교복이다.
동복은 상하의 모두 검은색이나, 하복은 상의는 반팔 흰색 셔츠, 하의는 검정색 바지이고, 기본적으로 양복을 입는 것과 동일하게, 흰색의 긴팔셔츠를 입고, 그 다음에 하의를 입고, 상의를 입고, 최종적으로 양쪽 못 깃에 달린 호크로 목을 채운다.
가쿠란은 한자로 쓰면 学蘭으로, 여기서 蘭은 "오란다(아란타)", 네덜란드를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네덜란드풍 옷은 아니고, '서양에서 들어온 학생 옷'이라는 뜻이다. 일본은 처음 네덜란드를 통해서 서양문물을 접했기 때문에, 생소한 서양식 물건이나 학문에는 蘭자를 붙이다 보니 붙은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차이나 칼라 교복'이라고 한다. 상의의 옷깃을 '차이나 칼라(china collar)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1873년부터 입기 시작했고, 동복은 검은색, 하복은 하얀색이었다.
여학생의 세일러복이 해군 수병 제복의 변형인 것처럼 남학생의 가쿠란은 19세기의 보편적인 신사용 약식 정장이었던 Sack Coat가 변형된 것이다. sack coat는 군복에서 비롯된 패션으로 사실상 현대 남성 정장은 대부분 18~19세기 군복의 변형이다.
그림.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용 sack coat와 남북전쟁시 연방군의 sack coat
Sack Coat는 맨 윗단추를 풀어 젖히고 넥타이를 드러낼 수도, 끝까지 채워 버릴 수도 있었는데, 주로 민간에선 윗단추를 풀었고 군대에선 다 채웠다. 이후 풀어 젖힌 형태가 그대로 고정된 게 지금의 서구식 정장 상의가 된다. 현재도 한국, 미국, 일본, 영국 등에서 해군 장교/부사관 하정복은 흰색 가쿠란(하쿠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군용 sack coat가 변형된 일본 육군 사병용 프록코트가 원형이다.
그림 Frock Coat의 다양한 종류.
이런 frock coat 또는 sack coat는 군대에서는 튜닉이라고도 불리운다. 원래 튜닉이란 목에서 무릎까지 내려오는 헐렁하고 짧은 옷이다 모양은 소매가 달린 T자 형이고, 보통 허리에 벨트를 매어 입는 원피스 형태이다. 튜닉이라는 이름은 라틴어 튜니카(tunica)에서 나왔는데, 튜니카는 고대 로마인들이 입던 옷이다.
18세기 당시 유럽과 러시아 기병대의 전투복이 그 시초이며, 시간이 지나 20세기 즈음이 되자 전투복에서 근무복으로 용도가 변경된 의류이다. 당시에는 목깃 카라 부분이 높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카라의 높이가 낮아졌다. 육군은 녹색과 흰색, 공군은 푸른색, 해군은 흰색과 남색 키텔 튜닉을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녹색의 육군용 튜닉이 6.25 전쟁 당시의 인민군 군관 군복으로 알려져 있고, 육군사관학교, 육군 3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의 정복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이 가쿠란이 중국으로 가서는 중산복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쑨원이 일본에 체류할 당시 가쿠란을 보고 "우리도 저런 실용적인 옷이 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하고, 가쿠란을 본떠서 디자인했다는 설이다. 참고로 중산복은 인민복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으며 재봉 방식에 따라 인민복(본토), 국민복(대만)으로 나누어진다.
그림. 미육군 제7기병대 부사관 튜닉, 1940년대 소련해군 장교 튜닉
이런 튜닉 또는 frock coat 형태의 군복은 어떻게 현재의 형태가 되었을까?
몽골 중기병의 복장. 철판으로 만든 투구에는 얇은 철편을 가죽으로 엮은 목가리개와 말꼬리로 만든 장식이 붙어 있다. 이 말꼬리 장식이 훗날 기병들의 모자 깃털장식으로 변화된다.
13세기 유라시아 거의 대부분을 석권한 몽골군은 가벼운 갑옷을 입고 작고 가벼운 활을 이용해서 근접전을 회피했다. 부득이하게 근접 육박전에서는 쇠도끼 또는 작은 칼을 사용했다. 1236년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에게 모스크바가 함락되고, 1241년 부다페스크가 함락되고, 발슈타트에서 무적이라 믿어지던 중장갑 기사단으로 구성된 독일 폴란드 연합군까지 전멸하고 만다. 동시에 유럽 내부에서는 새로 개량된 석궁과 미늘창(창에 갈고리-미늘이 달림), 화약무기가 등장한다. 몽골의 기병에게 처절하게 패배하고, 신무기인 석궁과 화약 무기앞에 무기력해진 중세 동유럽의 중기병 기사들은 말과 기사 본인이 착용했던 무거운 갑옷을 벗기 시작한다. 또한 장창과 큰 칼을 버린다.
독일, 프랑스같은 서유럽 국가들이 여전히 로봇 같은 갑옷을 입고, 장창을 갖고 토너먼트 경기에 열중하던 15세기부터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 기사들은 경기병으로 바뀌어 간다.
하지만, 여전히 말은 전장에서 가장 효과적인 이동수단이자, 적의 비숙련 보병에게 물리적인 충격력을 가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애용되었다. 그렇지만, 중세의 중기병이 비싸고 무거운 갑옷과 말, 장창과 방패 등을 실어 나를 여분의 말과 종자 등 모든 것을 자비로 장만했어야 했기에 병력이 소수가 될 수밖에 없었던 반면, 경기병은 누구나 형편만 된다면 말 한 마리만 끌고 군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병대의 규모가 커질 수 있었다.(영국의 경우 20세기 초까지 기병이 되려면 자기 말을 끌고 입대해야 했다.)
1415년 8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 참가한 프랑스군은 당시 프랑스에서 동원 가능한 거의 전부인 약 1200명의 중장갑을 한 기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중세 기사보다 저렴한 비용이 소요되는 경기병의 시대가 오자, 기병의 숫자는 비약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16세기 말부터 중세의 봉건제도와 장원식 경제가 붕괴하고, 상비군이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기병대는 더욱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후 몽골과 아시아의 영향을 받은 동유럽의 경기병은 서유럽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경기병들이 갖고 다니던 칼이 우리가 사관학교나 국군의 날 행사 시 흔히 보는 예도이다.(보통은 장교들이 결혼식을 올릴 때 더 많이 볼 수 있다.) 예도의 정식 명칭은 saber(sabre) 세이버, 프랑스어로는 사브레라고 하는 騎兵刀이다.
그림. 한국군 예도(좌)와 sabre(우)
원래 영화 원탁의 기사나 엑스칼리버 등에 등장하던 중세의 기사들이 사용하던 칼은 일직선으로 곧고 큰 양날의 검이었다. long sword, short sword 등의 양날 한손검과 two handed sword, bastard sword, 클레이모어(claymore) 등의 양날 양손검을 주로 사용했다.
중세시대 전체에 걸쳐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한손검은 양날에 대부분이 약 30 ~ 35인치(75~95cm) 정도의 길이이며 갑옷의 발달과 철가공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그 모양이 지속적으로 변화하였으나 한손으로 사용하는 양날의 장검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양손검은 13세기 이후 새로이 등장한 무겁고 긴 검으로 전투의 상대인 기사의 갑옷이 두껍고 무거워 짐에 따라서 베거나 찌르기 보다는 무거운 검으로 찍거나 때려 누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워낙 무거워서 보병이 사용하거나 기사가 말에서 내려 싸울 때만 사용할 수 있었다. 바스타드 소드 역시 두손으로 잡고 휘두르는 검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한손으로 잡고 사용할 수 있도록 경량화된 양손검이다. 클레이모어는 화기의 발달로 갑옷의 중요성이 낮아진 시기에 영국의 하이랜더들이 개발한 양손검으로서 베기에 적합한 검이다.
하지만, 경기병으로 변화하면서 이렇게 무거운 칼보다는 한손으로 말고삐를 쥐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면서 다른 한손으로 땅바닥의 적 보병들이나 기병을 후려 벨 수 있는 가벼운 칼이 필요해졌고, 칼의 강도를 생각하면 당연히 외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기병들에게 적합한 칼이 있었으니 샴쉬르(Samshir)라고 하는 무굴제국(현재의 인도)의 칼이었다. 원래 페르시아의 칼이었던 시미타(Scimitar : 사자의 꼬리라는 의미, 만곡도)가 중동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무굴제국에서는 샴쉬르(Samshir) 또는 몽골 신월도(新月刀)라 불리었다. (시미터는 샴쉬르의 영어명이다. 의미가 사자의 꼬리이니 만큼 왕족의 심볼으로도 쓰였으며 몽골, 페르시아에서 발명되었다.)
그림. 샴쉬르(Samshir)(좌)와 시미타(scimitar)
길이는 80~100cm이며 가끔 1m가 넘는 것도 발견된다. 폭은 2~3cm이며 무게는 1.5~2kg정도이다. 초승달처럼 유연하게 휜 몸체와 그와 반대의 방향으로 휜 손잡이를 가지고 있다.(파도모양으로 측수된 것 있다.) 휜 몸체는 베기 공격에 큰 위력을 준다.
몽골군 검술이 주로 내리쳐 베는 것이었기 때문에 곧은 모양이었던 신월도(만곡도)가 휜 모양으로 변하였고 검의 모양이 변하면서 검이 검술을 변화시켜 수평으로 베는 기술도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칼이 유럽으로 전해지면 샴쉬르 - 시미타 - 샤벨(독일) - 사브르(프랑스) - 세이버(영국)로 이름이 변하였다.
사브르로 무장한 최초의 경기병은 후사르(hussar : 검기병)이라고 불리웠다.
헝가리에서 유래한 후사르는 재장전하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화승총을 든 사수들로 구성된 17세기 보병대를 유린했다.
당시 보병대는 위에서 이야기한 재장전 시간의 제한으로 인해 질서정연한 대오의 유지와 지휘관들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화력통제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대형이 무너지는 것은 지휘통솔이 안되고, 화력통제가 안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의 전장은 양군의 보병 밀집부대가 대대 단위 또는 중대단위로 대형을 이루어 상호 접근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러한 보병 대오를 향해 상오 포병대가 포탄을 쏘기는 하지만, 내부에 화약이 없는 포탄은 그냥 크기만 한 총알일 뿐이었다.
상호접근한 보병대열이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오별로 순차사격을 시작하기 전인 300~400미터 정도가 되면 아군 진영 뒤에 대기하고 있던 경기병들이 앞으로 나와 열을 짓고, 칼을 뽑아들고는 적진을 향해 맹렬히 돌진한다. 땅바닥에 두발로 선 보병들은 자신들보다 두배는 큰 말을 탄 기병들이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면 그 말발굽에 짓밟히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림 19세기 hussar style의 gala uniform을 입은 헝가리 장군(좌)와 Polish Winged Hussar(우)
이런 돌진하는 기병들을 향해 소총을 발사하더라도, 재장전에 최소 1분 가까이 걸리는 화승총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1분 사이에 기병들은 한두명의 운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적의 대형속으로 짓밟고 들어가게 된다. 말발굽에 밟히고, 기병들이 휘두르는 기병도에 베이면서 보병대는 유린되고, 기병도에 베이지 않더라도 달리는 말발굽에 밟히면서 공포에 사로잡히고 적 보병의 대형은 급격하게 무너지고 패주하게 되어있다.
게다가 적보병의 대열이 종심이 얕은 횡대대형이라면 전속력으로 달려온 경기병은 적의 보병대령을 그대로 관통해서 보급대나 적의 포병대를 유린할 수도 있고, 180도 돌아서 아군의 보병대열과 함께 적의 보병을 포위하면 그 전투의 승패는 결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밖에도 우회기동으로 적의 포병이나 보급대를 공격하거나 정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결국 적 경기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경기병을 양성할 수 밖에 없었고, 경기병은 곧 군내의 엘리트 부대이자 많은 예산을 소모하는 병종이 되었다.
더욱이 이런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자면 기병대는 보병보다 더 장기간의 훈련을 받고 전술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단시간 내에 전장상황을 판단하고, 대형을 변경하고 기동할 수 있어야 했고, 말을 자신이 지참하고 입대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병대는 전원이 장교이거나 장교의 비율이 대단히 높았다.
그러다 보니 기병대의 복장은 장교와 부사관의 상징과 같았다.
그래서 튜닉이 frock coat가 장교단의 상징이 되었고, 사관생도들의 정복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그럼 우리 여기서 처음 이야기한 collar, 견장, 턱끈 등 교복이나 정복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림. 공군사관생도들의 예복과 예도. 이 예복도 튜닉이지만 후사르가 아닌 프랑스 혁명기의 기병인 샤쇠르와 드라군의 복장에 가깝다.
생도 정복이건 예복이건 우리가 흔히 ‘카라’라고 부르는 collar라는 두꺼운 목부위가 있다. 이 collar를 '호크‘ 또는 ’호꾸‘라고 부르는 hook로 체결한다. (이 collar를 풀어서 옆으로 제쳐서 입기 시작한 게 양복의 카라(깃)이 된 것은 부차적이다.)
그럼, collar은 왜 두꺼워졌을까?
위에서 전술한 기병도, sabre 때문이다. 중세의 기사들의 sword가 그 무게로 찍어서 갑옷이나 뼈를 부러뜨렸다면, 기병도는 너무 가벼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림. 기병도를 겨누고 돌격하는 1차대전의 영국군 기병. (영화 war horse 중)
그래서, 경기병이 겨눈 적의 치명적 부위는 바로 목이었다. 목에 있는 경동맥을 베어 버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적인 적 경기병 또한 아군 경기병의 목을 노리기 때문에 그 목을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천과 단단한 내용물을 집어넣은 collar로 목을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collar에 부대 또는 병종 마크로 장식을 하기 시작을 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그 다음은 어깨 위의 견장(shoulder strap)을 알아보자.
기병도로 적의 목에 있는 경동맥만을 겨누기에는 목 부위는 너무나 공격하기에 좁았다. 그 다음으로 노리기 시작한 것은 어깨였다. 어깨를 내리쳐 쇄골을 부숴 버리거나 삼각근을 끊어버리면 팔을 못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판을 덧댄 것이고, 그 판에 각종 장식을 하고 계급을 표시하기 시작한 것이 견장이 된 것이다.
모자의 챙에 보면 금속으로 된 끈이 붙어있다. 이것은 왜 있을까? 그것도 기병대와 관련이 있다. 군인의 정복이나 예복에 쓰는 군모는 눌러서 쓰는 것이 아니라 걸치는 개념에 가깝다. 설사 눌러 쓴다고 하더라도 전쟁터에서 뛰거나 말을 타고 달릴 때는 쉽게 벗겨졌다. 그래서 말을 타고 달리더라도 군모가 벗겨지지 않도록 턱끈을 부착해서 턱에 걸치고, 평시에는 턱끈을 줄여서 모자 챙 위에 걸쳐놓았던 것이다.
이 턱끈을 계급에 따라 검은 가죽끈, 은실, 금실로 장식한 것이다.
그림. 영국 경기병들이 말을 타고 이동 중 모자를 고정하기 위해 턱끈을 한 모습.
이 세상에 유래가 없는 존재는 없다. 특히 사람이 만든 것들은 처음 만들어 질 때부터 용도가 있었고, 이후 각국의 문화와 정세에 따라 변형되면서 이어져왔다.
미국에서는 해군참모총장이 가슴에 패용하는 기장을 부적절하게 달았다는 이유로 자살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고급 장교가 정복을 입고 정모를 손에 들고 걸어가고, 갓 임관한 장교/부사관이 가슴에 기장을 한줄 군장부에 가서 사서 달고, 병사들이 전역하면서 예비군복에 온갖 화려한 장식을 하고 나간다.
우리가 자신의 뿌리를 알고 역사를 알아야 제대로 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듯이, 군인이라면 무릇 자신의 복장의 유래를 제대로 알고 올바로 입을 줄 알아야 군인 정신도 바로 잡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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