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야기

일본 육사 출신의 조선인

無名人 the first 2015. 8. 18. 01:12

국군에 일본군/만주군 출신은 누구 누구가 있을까?

대한제국에서 일본 육사 유학은 1882년에 시작되었다.


최초의 일본육사 입학자는 1. 박유굉이다.

그는 일본 육사 졸업후 귀국하지 않고 있다가,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여 그 세력이 몰락하자 본국정부로부터 소환령이 내리자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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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기(1899년11월 21일졸업, 1900년6월 22일임관) 

박유굉 이후, 청일 전쟁후 친일 정권이 들어서자, 120명의 학생이 일본에 집단유학을 떠났는데, 그 중 21명이 군사연구생으로 일본 육사 11기로 입교하였다. 하지만, 졸업 전 본국 정부가 친러파로 바뀌어 상당기간 귀국을 못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유학 중 쿠데타 음모를 한 사실이 귀국 후에 밝혀져 4명이 처형되었다

 

그 중 이력이 밝혀진 사람은 다음과 같다. 
    2. 노백린(임시정부 총리, 대한제국군 대좌, 한국무관학교 교장, 미국 망명, 한인 독립군 부대 조직, 비행학교 설립 및
공군 독립군 양성, 공군의 중요성 역설, 3.1 운동 후 한성임시정부 군무부 총장, 1926년 상하이에서 병사,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  추서. 아들인 노선경, 노태준, 딸 노순경도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3. 윤치성(윤치영씨의 친형, 젊은 나이에 작고)
    4. 어담(일본육군 중장, 육군 포병 참위로 임관, 합병 후 일본군으로 복무, 고종의 시종무관, . 1910년한일 합병 후
  조선 왕실 호위부대인 조선보병대에서 근무. 1930년 일본 육군 중장으로 진급,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5. 박재덕(대한제국군 대대장, 군대해산 때 일본군에 무장 항거)
     6. 김관현(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일본육사 11기, 러일전쟁에 일본군으로 참가하여 종군기장(從軍記章)과 전공금(戰功金)
1천5백원을 받음. 1905년유길준 등과 함께 역모혐의를 받았으나 곧 석방. 대한제국군 참서관·서기관, 광제원장, 내부 회계국장, 위생과장, 남양군수 등의 행정 관료직 역임. 

한일 합방 후 수원군수, 함경남도참여관, 전라남도참여관, 충청남도지사, 함경남도지사 역임. 중추원 칙임참의. 조선토지 개량 주식회사 고문, 화북장병 위문대에 가담 중국 전선의 일본군 위문. 총독부가 1935년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일제의 통치에 공을 세운 조선인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
       
      ※ 나머지 12명 기록 미상

 
15기(1902년 유학, 1903년11월 30일졸업, 1904년2월 12일임관, 8형제파)
   일본 밀정인 배정자가 남편인 현영운등 8명을 뽑아 보낸 대한제국국비 유학생 
      19. 김응선(대한제국군 소장, 영친왕 시종무관)
      20. 박영길(일제 때 도지사, 상업은행장)
      21. 류동렬(1877-1950), 미군정청 초대 통위부장-국방부 장관, 독립운동가. 1903년(고종 40) 일본 육사 졸업, 대한제국군 참령, 1907년 군대가 강제해산 후 안창호·이상재·윤치호·김구 등과 신민회 조직,
1909년에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살해사건의 배후인물로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석방, 1911년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뒤에 만주로 망명. 1919∼1925 상해임시정부 초대참모총장, 한때 공산주의운동에 참여. 1935년 南京에서 김규식·지청천·신익희 등과 민족혁명당 조직. 광복 후 귀국하여 미군정청 초대 통위부장 역임.  6·25 때 납북되어 자강도 희천 부근에서 病死.
     22. 박두영(일본군 대좌, 1880년11월 28일~ ?, 조선총독부 참의)  1904년 포병 참위로 임관, 
의병 토벌에 앞장(의병장 이강년을 제천에서 체포, 사형 당하게 함). 만주국에 군사 고문으로 파견되어 있다가 1932년 일제가 창단한 간첩 조직인 민생단의 단장 역임, 1937년부터 광복 시점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민생단 사건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에 큰 타격을 줌. 태평양 전쟁시 경상남도지역 순회 강연을 맡아 징용, 징병 지원을 권유. 전쟁 지원용 비행기 생산을 위한 금강항공공업주식회사이사 역임.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 위원회에 의해 체포,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석방.
       23. 이갑(대한제국군 참령, 1877.5.12∼1917.4.24) 독립운동가. 
일본 육사 졸업 후 귀국, 참령이 되었다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군대에서 나옴. 1906년 정운복 등과 함께 [서북학회]ㆍ[오성학교]를 창립하고 새 세대의 교육에 힘쓰는 한편,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조직. 뒤에 시베리아에 망명하여 이강과 함께 정교보를 발행하며,  밀산무관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독립 운동에 종사하다가 향년 41세에 지병으로 사망.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 추서. 숨을 거두면서 "이응준군에게 내 딸을 맡긴다"는 유언을 남김. 당시 일본군 중위였던 이응준 장군은 일본육사 선배이자 자기를 친아들같이 키워 준 이갑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3년 후 이갑선생의 외동딸인 이정희여사와 결혼.       당시 일본군 장교는 육군대신의 사전승인을 얻어 결혼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응준 장군은 그런 절차를 무시하고 결혼하여 말썽이 되었으나, 당시 일본 육군대신은 보고를 받고 "조센진은 할 수 없군"이라고 하면서 가볍게 근신 처분을 내렸다고 함. 이응준 장군은 17살 때 고향인 평남안주에서 무작정 상경하여 당시 대한제국군 훈련원장인 노백린 정령(대령) 댁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갑 선생의 눈에 들어 그의 집에 입주하면서 학교도 다니고 유학도 하게 되었음. 독립군이 자신의 딸을 일본군 장교에게 맡기다니, 지금의 우리로서는 다소 이해가  안가는 게 그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으로 판단됨.
       24. 김기원(일본군 중좌, 김정렬 초대 공군참모총장의 큰 아버지)

     ※ 나머지 2명 확인 못함.

 

23기(1909년 입교, 1911년 5월 27일 졸업, 1911년 12월 26일 임관) 
       26. 김경천(金擎天)/김광서(金光瑞)/김응천(金應天)/김경천(金擎天, 金警天 또는 金敬天)/김일성(金日成)(일본군 중위, 
한국 독립군, 1888년 6월 5일 ~ 1942년 1월 2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무관 가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남. 아버지인 김정우는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대한제국군 장교였음. 군인인 아버지 및 형들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군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자비로 단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11년 일본 육사를 졸업(제23기)하고 도쿄에서 기병 장교로 근무, 1919년 2·8 독립 선언을 계기로 탈출을 결심하고 귀국. 그해 6월 초 일본 육사 3년 후배(26기)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총재 안병찬) 가입 활동,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근무. 일본 육사 출신으로 현역 일본군 장교인 그의 가세는 무장 독립 운동에 큰 도움이 됨.
1919년 연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백두산과 압록강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싸웠으며, 창해청년단(단장 김규면) 총사령관으로서 전투를 거듭하면서 시베리아 지역에서 위명을 떨침. 1921년에는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되었고 러시아의 볼세비키 적군 세력과 연합하면서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음.
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였으며, 김경천은 사령관이 됨. 그해 말에는 고려혁명군(사령관 김규식)이 조직되었고 그는 동부사령관을 역임. 그러나 자유시 참변으로 연해주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노령(露領) 무장 독립 운동의 선도격이던 그의 입지는 좁아짐. 1922년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음.
1937년 스탈린 정권 하에서 그는 간첩죄로 체포되었고, 1939년 재차 체포되어 두 차례 복역. 두번째 복역 중 유배된 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나 경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음.
일본 육사를 졸업한 장교로서 보장된 앞길을 버리고 홀연히 망명한 뒤 시베리아 일대에서 '김일성 장군'으로 불리며 유명해진
 그는 흰 말을 타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누비는 전설적인 항일 영웅으로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음. 특히 김경천은 여러 가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김일성이 그의 가명과 항일 투쟁 경력, 전설적인 이미지 등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됨. (작고하신 본인의 부친께서도 동일한 증언을 하신 바 있음.)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26기(1914년 5월 28일 졸업, 1914년 12월 25일 임관) - 조선인 13명
   - 1909년 군대해산 후에도 존속해 오던 한국무관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교되자, 당시 재학중이던 조선인 50명 중 희망자 42명이
무관학교 고문으로 와 있던 일본군 대위 고꾸라의 인솔아래 일본으로 가서 일본 육사 옆의 유년학교에 편입되었음.  이후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일부는 망국의 분함을 못참고 귀국하고, 13명은 일본 육사 26기로, 22명이 일본 육사 27기로 입교. 

       27. 홍사익(일본군 중장, 460명 졸업 중 22등, 필리핀 포로수용소장,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군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의 책임을 물어 전범으로 교수형 당함)  홍사익 중장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하지 중장이 이야기 한 것처럼 "일본군 중장까지 올라간 것만큼 명백한 친일의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말도 있고, 구 일본군에서 근무했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고국의 각급 단체들이 구명운동을 벌일만큼, 일본군 내에서의 조선인 병사와 징용자들을 보살폈던 민족주의자였다는 설이 대립한다.

       28. 김준원(초대 공군참모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정열장군의 부친) 
       29. 박승훈(육군 중령, 여순반란사건 당시 14연대장) 
       30. 신태영(국방부장관, 신응균 장군의 부친) 
       31. 안병범(육군대령, 한국전쟁시 자결), 
       32. 안종인(육군 준장)
       33. 유승렬(육군 소장, 유재흥 중장의 아버지)
       34. 이대영(李大永)
       35. 이응준(육군 중장, 졸업시 460명 중 32등, 일본육군 대좌, 군정청 군사고문, 초대 육군참모총장), 러시아 10월 혁명 후 일본군
시베리아 출병에 참가, 만주사변/중일전쟁에도 참가하여 장개석 군과 교전.  주로 지원부대나 고급 사령부 요원으로 근무. 그렇다면 이응준은 친일파인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응준은 일본군 대좌(대령)까지 지낸 일본군 출신이다. 하지만 그의 부인은 일본 육사를 15기로 졸업하고 구한말 한국군 참령을 지냈으며 도산 안창호와 신민회 활동을 하였고,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이갑의 딸이었다. 그런 연고로 이응준은 임시정부와도 내통하였으며 망명한 동기생인 지청천의 가족을 돌보는 등 일본에 있어 요주의 인물이었다. 독립군의 딸과 승인 없이 결혼하는 것은 일본군에서 파면감이었지만, 오히려 일본군은 이응준이 독립군에 투신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미약한 징계로 일본군에 붙잡아 놓았다. 이응준은 해방 후에는 일본군 출신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자숙 중이었으나 광복군과 일본군의 중간 완충역을 맡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미군정 국방사령부 고문에 초빙되었다. 그리고 그의 장인과 일본육사 15기 동기이자 임시정부 군무부총장을 지닌 유동열을 직접 설득하여 미 군정청 통위부장에 취임시켜 광복군 출신들이 국방경비대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 - 이재우, 하룻밤에 읽는 일본 군사사-


       36. 지청천(대한민국 임시정부 총사령관,1888년 2월 15일 ~ 1957년 1월 15일) 
       임관 후 1919년 중위 때, 선배인 김경천과 함께,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이 되어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  이때 망명하면서 일본군의 병서(일종의 전술교범)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감. 1920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로 건너갔다가 초빙을 받고 서로군정서로 건너가 서로군정서 간부에 취임, 그러나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의 한국인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폐교 병력을 간도로 이끌고 탈출.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때 소련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지만 북만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이범석 등과 고려혁명군을 결성. 이후, 서일, 홍범도, 김규식,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지청천이라는 이름은 이 때부터 사용했다고 함. 이후에도 여러 항일무장투쟁단체 결성에 관여. 양기탁, 오동진 등과 정의부를 조직했고, 김좌진이 저격당한 후인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고,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창설. 1930년 7월에는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가하였고, 독립군의 총사령관에 취임. 만주에서 무장항일활동을 벌였으나 병력만 잃게 되자 1933년 5~6월경 중 지청천과 이범석은 100여 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중국 본토로 이동, 1933년 후반 김구 세력과 합류하였으나 1934년 지청천은 탈당, 신한독립당을 창설하여 따로 나가서 민족혁명당의 김원봉에게 접근, 1935년 김원봉·김규식의 민족혁명당에 참가. 그러나 김원봉과 갈등하다가 김원봉이 좌익 경력자들에 대한 유화와 포용책을 펼치자 반발하여 1937년 4월에 탈당하고 조선혁명당을 창당. 

1940년에 중일 전쟁의 여파로 충칭(重慶)으로 옮긴 임시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이동, 그해 9월 광복군 성립전례식에 참석하고,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항일전을 수행. 이후 광복군을 인도에 파견하는 작전 제의에 승인.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하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이 되었으나 독자적으로 활동했고, 광복군의 1,2,3지대 역시 각각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각자 자기 파벌의 세력확장에만 치중하였으므로 이청천은 명목상 사령관이었지만 이들을 통솔하기 어려웠음.
1944년 일본군에 있다가 광복군에 귀순한 장준하 등으로부터 김원봉이 간계를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는 보고를 받고 이후 직접 광복군을 사열. 장준하는 그가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자료를 이청천에게 보고.  광복군 일부의 횡포가 계속되자 김원봉은 이를 이용하려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함.

45년 10월 7일 충칭의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이 상하이로 왔는데 일본군 출신 부대는 사령관 이청천에 대한 사열을 거부(해방이 되었는데 국내로 들어갈 생각은 안하고 출신에 관계없이 무차별로 광복군의 규모만 늘리고 있었음). 장준하 등은 그들 가운데 모 장교, 모 장교 등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이 문제에 대한 의논을 시작. 후일 장준하는 이를 두고 '의논을 시작했지만 실은 회유작전이었다.'고 하였음. 장준하 등은 김원봉의 계획을 이청천에게 보고하는 한편, 일본군 출신 탈영자들에게도 알려주고 그 대리인 노릇을 했던 책임자 황모와 이소민에 대한 자료를 주어 그들을 불신임시킴(잘한다. 조선인들끼리~~~~). 설득은 주효했고 이청천이 직접 사열을 받게 됨. 

1945년 광복 후 광복군의 재건을 희망했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고, 1947년 4월 22일 김포공항을 통해 개인 자격으로 귀국. 그의 귀국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프란체스카 도너, 이범석 등이 친히 마중나옴. 지청천이 귀국하자 이승만은 그에게 청년단체를 만들 것을 권고. 1946년 9월 지청천은 대동청년단에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해 우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을 확대개편하고 단장에 취임. 민족청년단의 이범석을 견제하려던 이승만은 지청천이 귀국하자 그를 중심으로 한 대동청년단에 족청을 흡수시킴. 이후 독립촉성국민회 최고위원, 한중협회 회장 등을 지냄.(한 때의 동지가 정적이 되는 현실!)
1948년 1월부터 정부수립론을 놓고 남북협상론과 단독정부 수립론이 나뉘게 되자 그는 단독 정부 수립론을 지지, 임시정부를
사퇴하고 독립촉성국민회에 입당. 1948년 4월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지 않고 신익희 등과 한국독립당을 탈당. 5월에는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성동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6월 1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에 선임. 8월 15일 정부수립 후 초대 무임소장관에 임명. 그 뒤 1949년에는 신익희·임영신·윤치영 등과 함께 친이승만계 정당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가 탈당, 민주국민당으로 건너가 민국당 최고위원, 민주국민당 대표 최고 위원 등을 역임. 1949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결성 때 대한청년단 최고위원에 추대됨.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한국 전쟁 때는 서울을 떠나 피신해 있다가 휴전 이후 서울로 되돌아 옴. 이후 국회 전원위원회 위원장,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장,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자유당에 입당하여 자유당 원내 대표위원, 자유당 중앙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기타 사회 활동으로는 대한 적십자사 중앙집행위원, 대한 군인유가족 회장, 반공 통일연맹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고, 1957년 1월 15일 사망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딸 지복영은 광복군에서 활동하던 항일운동가였고, 아들 지달수, 지정계 역시 항일운동가였음.  귀국 후 지청천은 두 아들 
지달수와 지정계를 국방경비대에 입대시켰고, 이후 국방경비대가 국군으로 바뀌면서 군인으로 복무했음. 아들 지정계는 육군 소위로 1946년 여순 반란 사건 때 토벌대로 교전 중 전사.
 ※ 3명 미상


27기(1915년 5월 25일 졸업, 1915년 12월 25일 임관) - 조선인 22명 입교, 20명 졸업, 현지부대 2년간 하사관 근후 정식 임관 

       40. 김석원(육군 소장, 일본육군 대좌, 육사 8기 특) 러시아 10월 혁명 후 일본군 시베리아 출병에 참가, 만주사변/중일전쟁에도 참가하여 장개석 군과 교전. 직접 전투부대 지휘관으로 앞장서서 당시 신문들에도 크게 보도됨.(자랑이다!). 만주사변 때 기관총대장(대위)으로 참전, 진두 지휘로 큰 전과를 올려 7백원의 상금을 받았고, 이듬해는 소좌로 특진. 당시 50원이면 도시 한 가구의 한 달 생활비였다고... 이돈을 종자돈으로 성남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총독부는 사립학교 신규 설립 허가를 안해주었으나, 김석원 소좌가 미나미 총독(창씨개명의 원횽)을 찾아가 담판을 지어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1개 대대로 중국군 1개 사단을 패배시킨 "남원전투의 신화"를 만들고, 이 기사가 크게 보도되어, 그 후로는 김석원 부대가 나타나면 중국군이 대결을 피했다고 함. 해방후 장개석 총통이 한국을 방문 진해에 들렀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건군 초기의 군 지휘관 문제를 걱정했더니, 군인   출신인 장개석이 "아니, 한국에는 왜 김석원이라는 군인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여 이박사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김석원은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말하자면 일제의 침략전쟁에 내가 동원된 것이다. 우리 애국지사들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고자 국내외에서 일제와 맞서 고군분투하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판에 나는 그와는 정반대로 일제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동원되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인가. 나는 그 때 이왕 군인이 된 바에야 일본인보다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생활 목표였다. 이것은 짧은 생각이었다."라고 하였다만.... 비겁한 변명이지요~~~  2남인 김영수는 일본육사 57기였으나 필리핀 전선에서 전사 

포항전투에서 학도병을 모집하여 전투에 참가시킴.
       41. 이종혁(애국지사)

       42. 백홍석(일본군 장군, 채병덕 총참모장의 장인)

       43. 정훈 (조선총독부 보도담당관, 언론 통제에 악명을 떨침)

       44. 장석륜(육군 대령, 구대한제국군 대좌)

      ※ 15명  확인 불가

 

29기( )

       60. 영친왕 이은(일본육군 중장) 

 

 

45기(1933년 7월 11일 졸업, 1933년 10월 20일 임관, 337명)

       61. 이우(일본군 중좌)

       62. 이형근(육군소장)

 

 

49기(1937년 6월 졸업, 471명)

       63. 이종찬(육군중장, 일본군 소좌, 육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을사조약시 법무대신으로 초기엔 반대하다가 나중에 조약체결 불가피론을 주장했던 이하영의 손자. 하지만, 이종찬은 이를 부끄러이 여겨, 부친 사망시 세습되던 자작 작위를 거부.(덕분에 나중에 반민특위 조사에서도 무혐의로 석방) 뉴기니 전선 종군. 귀국후 일제 치하의 행적을 반성, 군으로 복귀를 거부. 1948년 8월 14일 당시 국방부 장관 이범석으로부터 국방부 총참모장 제의 받았으나 거절(철기가 이종찬보다 고계급자들이 많았던 상황에서 왜 이런 제의를 했는지는 의문임)    

1949년 6월 22일,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에 의해 현역 육군대령, 국방부 제1국장(정훈국장 겸임)으로 일방적 발령 및 신문에 발표. 20일 후 군문에 재입대.  

1950년 6월 18일 수도경비사령관. 수원성 북문 폭파 저지, 50년 9월 1일 3사단장(당시 부관 김재규)으로 포항지구 전투 지휘 및 9월 30일 전군 중 38선 최초 도달. 북진 중 부산 병기행정본부장 발령. 51년 6월 23일 소장 진급과 동시에 육군 참모총장. 육군중장 진급. 부산 정치 파동시 이승만 친위 쿠데타 거부 후 해임.

       64. 채병덕(육군소장, 일본군 소좌, 한국 육군참모총장, 하동전선에서 전사) 부평 조평창 제3공장장(당시 근로동원으로 조병창에서 군수품을 만들던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을 돌봐주고, 민족지도자들과도 은밀히 접촉, 편의를 봐주었던 관계로 신생정부에서 요직을 맡을 수 있었음) 국방경비대 4여단장, 34세에 초대 육군참모총장, 4대 육군참모총장, 경남지구 편성관구 사령관, 7월 27일 하동전선에서 전사

 

53기(  )

       65. 신응균(육군 , 국방부 차관)

 

54기( )

        66. 김정렬(공군중장, 공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국무총리) 

 

 

55기( )

         67. 유재흥(육군중장, 일본군 대위, 7사단장, 2군단장, 1군 사령관, 국방부 장관)

         68. 김창규(공군중장, 공군참모총장) 

         69. 정일권(육군대장, 만주 봉천군관학교 5기 수석, 일본육사 수석, 만주고등군사학교 졸(일본 육군대학과 동격, 중장까지 진급 보장), 만주군 대위, 참모총장, 군단장, 합참의장)

 

 

56기(1942년 12월 졸업, 1672명, 일부는 1943년 5월 졸업)

          70. 박임항(육군 중장)

          71. 이형근(육군대장, 만주 신경군관학교 1기, 일본군 대위, 군영,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72. 최창식(육군대령, 공병감, 만주 신경군관학교 1기, 한강인도교 폭파의 책임을 물어 총살형, 이후 복권)

          73. 김종석

          74. 최남근

          75. 이주일(만주 신경군관학교 1기, 일본 육사 편입, 육사 7기 특)

          76. 최창언(만주 신경군관학교 1기 졸, 군영)

          77. 박임항(만주 신경군관학교 1기 수석 졸업, 육사 8기 특)

          78. 김민규(만주군관학교 졸)

          79. 조영원(만주군관학교 졸),

          80. 최창륜(만주군관학교 졸),

 

 

 

57기(1944년 4월 졸업, 1268명, 일부는 1944년 3월 졸업)

          81. 박정희(육군대장,만주군관학교 수석졸업, 일본 육사 57기 편입, 만주군 중위, 사단장, 군관구 사령관, 대통령) 해방후 광복군에 몸담았다가 1946년 6월 중국 천진에서 귀국, 9월 24일 육사 2기로 입교, 80일간의 교육 후 12월 14일 3등으로 소위 임관

          82. 이한림(육군중장, 군영, 1군사령관)

          83. 이윤섭

          84. 김재풍

          85. 김호량

          86. 정양수

          87. 김영수(김석원 장군의 2남, 2차 대전 필리핀 전선에서 전사) 

 

 

 

 

58기( 총 생도수 2000명) 조선인 6명, 만주군관학교 편입생 2명

          88. 정래혁 (육군 중장, 민정당 대표위원, 국회의장, 문형태 투서 사건으로 공직 사퇴) 6.25 당시 육본 작전과장, 3사단 참모장
          89. 박원석 (공군 중장, 공군참모총장)
          90. 신상철 (공군 중장, 군영)
          91. 한용현 (공군 준장?, )

          92. 최복수 (육군, 전사)

          93. 안광수 ( 총영사, 외무부 차관보)

          94. 최주종(육군소장, 만주신경군관학교 3기, 군영, 사단장, 5.16 가담, 군수기지 사령관)

          95. 강태민(육군준장, 만주신경군관학교 3기, 전사)

 

 

 

 

 

59기( 총 생도수 2800명 ) 조선인 3명, 만주군관학교 편입생 6명

         96. 김재곤  (1945년 8월 15일 사관학교 구대장에 의해 피살)
         97. 홍승화  (일본육사 59기, 일본 조총련?)
         98. 장창국  (육군 대장, 일본육사 59기),

         99. 강문봉 ( 만주신경군관학교 수석 졸업, 군영, 제1연대 창설, 2군 사령관, 김창룡 암살 사건 연루 4.19까지 복역, 국회의원, 스웨덴 대사, 연세대 행정학 박사)

 

 

 

60기(  )

        100. 장지량 (공군 중장, 공군참모총장)

 

기타

이영순(육군 중령, 일본 해군중위, 군영)

최경록(육군중장, 일본군 소위, 군영, 육군참모총장)

이춘경(육군준장, 일본군 소위, 군영)

김재규(육군중장, 일본군 특별간부후보생, 가미가제 훈련 중 해방, 김천중학교 교사, 육사2기(박정희와 동기) 14등 졸업

 

 

미군 군정청은 신생 대한민국의 국군을 건설하기 위하여 군경력자들로 하여금 미국식 군사교육을 이수하게 하기 위하여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하였고, 이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이 신생대한민국군의 원로가 되었음.

군사영어학교 : 110명 임관, 일본육사 12명, 학병 72명, 지원병 6명, 만주군 18명, 중국군 2명으로 68명이 장군 진급

대장 8명(이형근, 정일권, 장창국, 민기식, 김종오, 김계원, 백선엽, 김용배)

중장 20명(양국진, 최경록, 강문봉, 박병권, 백인엽, 김종갑, 함병선, 정래혁, 원용덕, 최영희, 이한림, 민병권, 김상복, 장도영, 김일환, 최창언, 송효찬, 강영훈, 박경원, 이응준)

참모총장 13명(이형근, 채병덕, 정일권, 최경록, 민기식, 김종오, 김계원, 최영희, 백선엽, 김용배, 장도영, 송효찬, 이응준)

합참의장 7명(이형근, 정일권, 유재흥, 백선엽, 최영희, 김종오, 장창국)

 

60년대 후반까지 군 수뇌부를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움직였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광복군 출신들이 군사영어학교 입교를 거부했던 것이 안타까운 것임.

 

 

만주 봉천 군관학교

 일본군 출신보다 더 요직에 올라감. 만주군은 오족협화 정책에 따라 한인, 일인, 만주인, 한족, 몽고인의 화합을 부르짖으면서도 내부에서는 한인과 일인은 별도로 중대를 편성하여 급양부터 차별을 두웠고, 이에 따라, 5개 민족간의 격심한 경쟁 가운데서 배양된 그들의 능력이 뛰어났고, 일본군 고문관제도에 잘 적응했던 이들이 신생 한국군에서도 미군 고문관과의 의사소통이나 그들과의 타폅과 협상을 통한 원만한 부대 운영이 좋은 평가를 받게 한 것이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만주군관학교 1~5기까지 중 3기 수석만 중국인이고, 1기 수석 박임항, 2기 수석 박정희, 4기 수석 장은산, 5기 수석 강문봉이었음

만주군의 조선인 장교/사병 중 남한으로 귀국한 사람은 120여명으로 대부분 국군 장교로 임관하고 그중 41명이 장성으로 진급

 

간도특설대 : 1939년 조선인들로 구성된 특수부대. 보병/기갑 혼성전투부대로서 당초에는 360명으로 창설되었으나,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로 늘어난 증강된 대대규모였다.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반수는 조선인이었고, 소대장 이하 하사관/사병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이밖에도 만주군에는 백계러시아인으로 구성된 천야부대, 몽고인들로 구성된 기야부대, 오르치온족 공작대 등의 소수민족 부대가 있었다. 이중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고 유명했다(어쩔...ㅠ.ㅠ). 일본군, 만주군이 못 해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웠다. 조선인의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라는 표현을 썼고 어느 일본인은 그의 저서에서 "간도특설대 요원들은 사기가 높고 군기가 엄정하며 책임감도 강하다. 잠에 못 이겨 졸았던 불침번은 다음날 자살하였다"라고 적었다.

이부대의 한국인 장교로는 김석범 중장(봉천 5기, 일본 육사 54기, 만군 대위)이 부대장으로 최선임이었다. 그 밖에 김백일 중장(군영, 만군대위, 전사)이 중대장을 했고, 임충식 전 국방부 장관과 이용 전 강원도 지사, 이동화 (육사 2기) 전 철도청장, 김대식(해병대 사령관), 신현준중장(해병대 사령관), 박창암(특임,), 이백일 의원, 백선엽, 송석하, 최경만, 윤춘근 장군 등이 있다.

 

김석범(해병중장, 만주 봉천군관학교, 일본육사, 간도 특설대, 해병대 사령관)

석희봉

임충식(국방부 장관, 간도특설대),

이용(전 강원지사, 간도특설대),

이동화(육사 2기, 간도특설대),

김대식(간도특설대, 해병대 사령관, 철도청장)

원용덕(육군중장, 군영, 만주군 중령-군의관, 국방경비대 사령관)

백선엽(육군대장, 군영, 만주 봉천군관학교 8기, , 만주군 중위, 간도특설대, 참모총장, 합참의장)

김일환(육군중장, 군영, 만주군 경리대위, 국방부차관)

신현준(해병중장, 만주군 대위, 간도특설대, 특임, 해병대사령관)

김동하(해병중장, 만주 신경군관학교 1기, 만주군 대위, 특임

김백일(육군중장, 만주군 대위, 간도특설대, 군영, 군단장, 전사)

윤태일(육군중장, 만주 신경군관학교 1기, 만주군 중위, 육사 9기, 서울시장)

양국진(육군중장, 만주군 중위, 군영, 3군단장)

문용채(육군중장, 만주군 대위, 군영)

박동균(육군소장, 만주군 군의관-대위)

박창암(간도특설대),

이백일(국회의원, 간도특설대),

신학진(육군소장, 만주군 군의관-중령, 군영)

최주종(육군소장, 만주군 중위, 군수기지 사령관)

송양하(육군소장, 만주군 군의관-대위, 간도특설대, 군영)

석주암(육군소장, 만주군 대위, 육사 2기)

김묵(육군소장, 육사 7기특)

이규동(육군소장, 만군중위, 이순자 부친, 전두환 장인)

박춘식 (육군소장, 만주군 중위, 육사 5기)

이기건(육군준장, 만주 1기, 만주군 중위, 조선인민군 소좌로 월남 귀순, 7기 특)

장은산(만주군관학교 4기 수석, 만주군 중위, 군영)

박태원(육사 6기, 사격연맹 부회장)

문리정(육군중령, 만주군 중위, 군영)

윤춘근(간도특설대, 육사 2기)

최경만(육사 2기, 간도특설대, 동서석유 고문)

김용기(육사 7기 특, 진해화학 고문)

박기병(육군소장, 만주군 부사관, 5관구 사령관)

김홍윤(육군대위, 만주군 중위, 군영, 교통사고로 사망)

김동훈(서울대 공대 교수)

육굉수(인하대 교수)

김광식(한양대 교수)

 

박승환 여운형계 사설 군사단체 조직, 만군 항공대 창설 에이스, 만주군 근무시부터 공산주의 심취, 연안에서의 지령 수행, 월북 후 숙청

최남근(육군중령, 만군중위, 6여단 참모장, 숙군시 처형)

이상진(육군소령, 만군 중위, 육사 2기, 숙군시 처형)

이병귀(육군소령, 만군중위, 육사 2기, 숙군시 처형)

오규범(육군 중위, 숙군시 처형)

김학림(육군소령, 만군 6기, 육사 1기, 숙군시 처형)

안영길(육군소령, 만군 2기, 숙군시 처형)

황택림(육군소령, 만군 5기, 육사 2기, 숙군시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