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야기

과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독립군을 토벌했는가?

無名人 the first 2015. 8. 13. 22:15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에 복무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보자면 독립군을 때려 잡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좀 더 들여다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는 1940년 4월 1일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습니다.

1942년 3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경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이때 박정희는 수석졸업 기념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영화 마지막 황제의 실제 주인공)로부터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습니다.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로 편입했습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합니다. 그리고 수습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국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고,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게 됩니다.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부대는 보병 제8사단으로 동만주 지역의 열하성이었습니다. 주 토벌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좌파계열 독립군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군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1930년대 이후의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공작인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최소 500여 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숙청되거나 학살당하였고 만주 지역 내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중국 공산당이 이를 방관함으로써 민생단 사건 이후 만주 지역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은 위축되었고 조선인과 중국 공산당 간의 연대도 약화된 지 이미 오래된 다음이었습니다.

 

그나마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한빈(韓斌)·김학무(金學武) 등 130여 명이 중국 공산당이 아닌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원과 도움을 받아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했습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을 도와 일본군 포로 심문 대적 심리전, 적후방에서 벌이는 첩보 및 공작활동에 종사했습니다. 조선의용대의 주력 부대는 1941년 봄에 황허 강(黃河)을 건너 조선인이 많이 사는 화베이(華北)지방으로 활동무대를 옮겼고, 의용대원들은 이곳에서 팔로군과 협력하여 호가장 전투, 반소탕전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활약했습니다만 박정희가 1944년 당시 배치받았던 동만주 열하성이 아니라 중국 화북 지방이었습니다.

 

만주지역에서는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항일투쟁을 주도한 군사조직으로, 중국인과 한국인 등의 민족통일전선 성격을 띠고 창설됩니다. 이들은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유격부대를 공산당의 주도로 통합한 군사조직이었습니다. 당시 만주에 있던 수많은 항일계열 군사조직중에 제일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1939년 만주군 간도특설대의 대대적인 공세에 의해 1942년 소멸되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김일성, 김책, 최현 등은 소련으로 피신 소련군 88여단에 배속이 되어 광복 후 귀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게 됩니다만 이 들 역시 1944년의 만주에는 없었습니다.

 

이와 관련되어서는 가장 북한이나 공산주의 무장독립단체들의 투쟁에 우호적인 부르스 커밍스 조차도 1940년대에 팔로군에 흡수되어 무장 투쟁을 펼쳤던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500명 좋게 봐줘야 1500명이 안된다고 하고 있습니다.(이 수치에는 광복군 제1지대로서 출발했으나 지대장이자 광복군 부사령관인 공산주의자 김원봉에 의해 팔로군으로 무단 이탈한 병력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훗날인 1949년 북한으로 들어와 북괴군의 질적 향상을 이룬 팔로군 소속 조선족 3개 사단의 주축 간부들이 되고 이들은 휴전후 연안파라는 이름으로 정치세력을 형성하지만 김일성에 의해 모두 숙청되고 맙니다. )

최대 1500명에 불과한 연안파마저 조선족으로서 독립된 부대를 유지하고 있지도 못하고 분산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국민공통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에도 1940년 이후 한국의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근거지를 중국 대륙에 위치한 충칭(重慶)으로 옮겼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만

광복군은 실전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사례가 전무하고 1945년 4월 당시 보고된 총병력이 339명에 불과한 소규모 조직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도 만주에서 1944~45년의 시기에 무장 투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즉, 1943~45년의 만주에는 이미 항일 독립군은 씨가 말라서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박정희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더구나 박정희가 일본육사를 졸업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만주군관학교 졸업후 위탁 교육이었고 졸업후에는 만주군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또한 만주국이 일제의 괴뢰국인 것도 사실이지만 만주족(여진족) 한족 조선족이 혼합되었던 국가이기 때문에 정체성이 애매하기도 합니다.

 

한편 박정희와 같이 만주 제8사단에서 복무한 신현준, 방원철 등은 오마이뉴스의 취재에서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나 박정희는 복무 당시 팔로군 토벌 기회가 전혀 없었으며 놀고 술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실제 박정희가 임관하여 자대배치된19944년 7월의 만주 전선은 대부분 전투가 없이 평온한 상태였고 전투다운 전투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전선에서 제대 된 전투가 펼쳐지던 곳은 중경 전선과 인도에서 버마 북부를 거쳐 중국 서남부로 보급로가 이어지던 버마 임팔전선이었습니다. 만주지역은 오히려 평온해서 1930년대 중일 전쟁시기에 일본육군에서 최고 정예로 일컬어지던 만주주둔 관동군은 예하 정예부대들을 사이판, 유황도, 필리핀 전선 등으로 차출당해 껍데기만 남은 병력으로도 관할 지역내 치안을 유지할 정도로 소규모 전투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나마 저항을 지속하던 팔로군/독립군/마적 등을 토벌하던 것은 관동군과 만주군의 김종원 등이 지휘하던 '조선인 간도특설대'였지 박정희가 근무하던 8사단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는 만주 보병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