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미국-캐나다 서부 자동차 여행

6월 6일 시애틀 도착

無名人 the first 2012. 7. 20. 15:18

 

 

대한항공은 역시 환승에 있어서는 전문 항공사인가 보다.

최초 두어달 전에 시애틀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할 때는 자리가 텅텅 비었었는데 1주일 전 쯤 갑자기 환승 손님들이 불어나더니

우리 딸 탈 자리가 없어졌다.

항공사 직원인 관계로 매우 저렴한 ZED ticket으로 가는 딸은 제값내고 타시는 유상손님들을 다 태우고 난 후 남는 자리에나 탈 수

있는데, 빈자리가 없어졌다. 오히려 over booking이다.! 이건 비상...

그러니까 싼 값에 탈 수도 있는거지? 괜히 싼 표이겠는가?

그래서 이리저리 알아보니, 당일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는 왠일로 좌석에 여유가 제법 있어서 급하게 샌프란시스코로 변경,

그리고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까지는 대한항공과 코드쉐어가 되어 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까지 가장 많은 비행편을

보유한 알라스카 항공으로 역시 우리 가족 3명의 ZWD ticket을 구입하고, 알라스카 항공 한국지사를 통해 listing을 했다.

listing이란 대기 손님이 해당 편에 내가 줄을 선다고 일종의 대기 예약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제돈 내고 타는 예약손님이 오면 내가 아무리 오래 기다렸어도 얄짤 없이 비켜서야 한다. 그러니 도박이라는 말씀...

 

그러고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비행으로 돌아오자 마자 바로 다음날 공항으로 다시 출근...

출발 전에 신문 배달 중지 재확인, 냉장고를 제외한 모든 전원 off,

인터넷으로 여행자 보험 가입(삼성생명이 제일 가격대비 보상이 저렴했다.) 나는 26000원, 아내는 29000원(동일한 보상인데 전업주부는

보험료가 비싸다. 뭔가 불합리하다), 딸 가현이는 5000원

 

 

출국 시간을 기다리며 허브라운지에서.... 아내는 PP(PRIORITY PASS) CARD로 무료 입장. 가현이는 생일이 몇달 지났지만 어린이

요금으로 입장시켜 줬다. $15. 성인 요금은 $27

※ PP 카드를 하나은행 플래티늄 카드 발급받으면서 가족용으로 같이 받았는데,유효기간 2년이 이번달에 지나 재발급을 받는데, 정책이

    바뀌어 이제는 본인만 갱신해 준단다. 나는 사실 별로 필요없는데...

    전세계의 공항중 PP카드를 사용해서 들어갈 수 있는 라운지를 확인하고 싶으면 WWW.PRIORITYPASS.CO.KR로 들어가서 확인하시라.

    인천공항에서 PP카드로 입장 가능한 라운지 중에서는 허브 라운지가 제일 알차다고...(사실 다른 곳은 들어가 본 적 없어 모르겠지만)

 

 

다음 사진은 대한항공 비지니스 석에서 제공하는 식사 중 일부

이것은  비빔밥을 주문했을 때 나오는 전채와 기본 반찬. 연두부와 장아찌, 새우 샐러드 등..

 

양식을 시키면 나오는 전채. 우리는 바게트와 술빵을 주문했다.

 

요것이 대한항공 비지니스 스테이크..

 

이건 후식으로 나온 하겐다스 아이스크림. 종류는 초코렛과 바닐라 두가지이며, 가끔은 하겐다스 대신 끌레도르가 나오기도 한다.

이밖에도 치즈와 크래커, 과일, 와인 등이 디저트로 제공되는데 이건 깜빡....

 

 

위의 사진들은 2nd meal로 제공된 쇠고기 덮밥과 오믈렛. 이때도 과일이 디저트로 제공된다.

 

너무 피곤해서 비행기안에서 거의 기절 수준으로 잠자다 보니 어느덧 샌프란시스코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Immigration을 통과. 나혼자 승무원 라인에 서있자 미국 국토안보부 경찰이 아내와 딸도 같이 승무원 줄에

넣어 주어 최단시간 내에 통과. 수화물을 가지고 검역을 통과하는데 아내와 딸을 보고 엑스레이로 보내려 하다가 유니폼을 입은 나를

보고 가족이라고 하자 또다시 pass.

서구권은 유니폼에 대한 존중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런데, 지상직원이 알려주는 안좋은 소식 하나...

오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유세를 하고 점심먹고 간다고 공항에 "Gate Hold" 절차가 발효중이라고...

비행기가 언제 뜰지 모르겠단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트램을 타고 국내선 터미널 1으로 이동(시애틀 행 비행기로 환승하기 위해)

 

국내선 터미널 1으로 이동해서 비행기 표를 받고 검색대를 통과하는데, 나는 이제 Duty도 아닌데 유니폼을 보더니 시큐리티가 또 우릴

부른다. 이쪽으로 와서 빨리 들어가라고.... 역시 Thank You! 가볍게 날려 드리고... 입장..

근데 알라스카 항공 지상직원들 일처리 정말 느리다. 여유만만인지, 느릿느릿인지... 여기에 비하면 대한항공은 거의 날라가는 수준에

손님이 왕!인거다.

무지하게 빠른 속도로 입국심사를 마쳤건만 어제까지도 빈자리가 많던 알래스카 항공이 어찌하여 이리 대기자가 많은지...

게다가 이날 오바마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여 비행기들도 연착됐다. 그러다 보니 2편의 항공기를 눈앞에서 그냥 보내야 했다.

딸은 기다리다 지쳐 의자에서 잠들어 버리고...

 

4시간을 기다려 겨우 탑승한 알래스카 항공. 탑승후에도 이륙까지 50분을 기다렸다.

그리고 또 한가지 놀란 거! 이 항공사는 개를 개바구니에 넣지 않아도 그냥 태운다. 타고 나서 보니 옆자리 밑에 개가 있다!

이륙하자 마자 기절... Descent Check "Cabin Prepare for Landing" call에 잠에서 깨었다.

 

주행거리 18km, 주행시간 25분

 

모텔은 H-Mart 인근의 Comfort Inn에 투숙.

프론트 직원(사장?)이 교포라 $10 정도 깎아주어 $83.18에 twin bed room 투숙(유료 생수도 공짜로 집어 줌)

 

 

 

 

 

비오는 가운데 일어나, 로비에서 free Continental Breakfast로 아침 해결. 내용은 제법 훌륭. 우유, 각종 빵, hot waffle, 소시지, 스크램블,

삶은 달걀, 과일 슬라이스와 쥬스, 커피 등이 나온다. 제법 괜찮다.

 

그리고는 이곳까지 오게 한 H-mart에서 장을 봤다.

김치, 쌀, 라면, 각종 밑반찬, 부탄가스, 운전중 피곤할 시 마실 박카스와 과일, 군것질거리 등에 $116.81 지출

 

주행거리 790km, 순주행시간 7시간 15분

시애틀에서 미줄라로 가는 길. 비가 오락가락하고 중간에 잠시 눈발도 날리고 군데군데 눈도 보였다. 나름 6월인데 이래도 되나?

 

 

미줄라 홍수로 인해 형성된 콜롬비아 강을 건너면서 찍은 다리

 

※ 미줄라 홍수(Missoula Flood): 미국 워싱턴주 동북부 지역의 콜롬비아 고원(Columbia Plateau)은 점성이 적은 용암이 흘러나와 미국의 아이다호, 워싱턴, 오레곤주의 상당부분(총면적 160,000 km2)을 덮고 단단하게 굳어진 현무암으로 구성된 편편한 화산지형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큰 용암대지 중의 하나이다. 평균두께가 1800미터나 되는 이 화산지형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엄청나게 많은 양의 용암이 흘러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과거에는 현재와는 달리 큰 지각변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위에 깊게 파인 계곡들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데, 그중 가장 크고 웅장하며 아름다운 계곡을 Grand Coulee라고 한다. 이 계곡들은 결국 오레곤주 포틀랜드를 거쳐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가는 콜롬비아 강을 형성한다.

  이 독특한 지형이 형성된 원인을 지질학자들은 수백 만 년 동안 느린 속도로 진행된 침식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하여 왔으나, Bretz라는 지역 지질학자가 대홍수에 의해서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진 지형일 것이라는 주장을 1923년 논문에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다른 지질학자들에 의해서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무시당해 오다가, 그 후 한평생 30여년 동안의 집념어린 연구를 계속하여 그의 주장이 옳았음을 드디어 인정받았다. 

  이것은 15,000~13,000년전 빙하기 말에 북미 대륙의 워싱턴주, 아이다호, 몬태나 주 일대를 뒤덮고 있던 빙하기 최후의 큰 빙산이 녹아 설상형의 빙괴가 흐름을 막았는데 몬테나주의 미줄라는 그 때 300m 깊이의 호수 밑이었다. 이 호수는 몬태나주 서쪽 스포케인의 Clark Fork강의 좁은 협곡에 형성된 빙괴가 물을 막아 거대한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 크기는 현재의 비국동부 5대호 중 하나인 미시간호의 절반 정도 크기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단다.

  하지만, 온도가 상승하고 물의 양이 많아지면서 압력이 증가되자, 이 물을 막고 있던 빙하댐이 무너지고, 곧이어 대규모 얼음이 흐름을 깨고 2000만 입방 킬로미터의 물이 서부 워싱턴주로 흘러들어, 수백 m의 퇴적물과 함께 흘러내려 육지를 깎고 워싱턴주와 오레곤주를 휩쓰는 거대한 홍수를 일으켜, 이 현무암 지대를 시속 60마일 이상의 매우 빠른 속도로 통과하면서 깊이 100m 이상의 흐름이 수일 간 계속되었다. 평소에는 일어나지 않는 특별한 침식원리에 의해 암석을 깨뜨리고 순식간에 그랜드쿨리라는 거대한 계곡을 만들었다.  

아래 지도에서 Ice dam에서 서쪽으로 회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홍수 피해지역이라고 한다.

 

 

아이다호 주로 들어가서 주유에 $52.18 지출(카드)

 

 

드디어 몬태나 주 입성!

 

몬태나(Montana) 미국 북서부 산악지대의 주라고 보통 소개가 된다. 틀린 표현은 아닌데 동부는 고원 평야지대이다. '보석의 주’라고도 불린다. 몬태나라는 이름은 스페인어로 ‘산’이라는 단어인 ‘몬타냐’에서 유래된 것리고 한다. 

몬태나

 

북쪽으로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앨버타·서스캐처원 주와 접하고, 동쪽으로 노스다코타·사우스다코타 주와 경계를 이룬다. 또 남쪽으로는

와이오밍 주, 남서쪽과 서쪽으로는 아이다호 주와 접한다. 주도는 헬레나이다.

몬태나 주에는 원래 샤이엔족, 네페르세족, 블랙풋족, 아시니보인족, 크로족, 플랫헤드족, 쿠트네이족, 팡도레이유족, 칼리스펠족, 앗나족

등의 인디언들이 주로 사냥·채집 생활을 하며 살고 있었다. 몬태나 주 대부분은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미국의 일부가 되었다.

오리건 군에 속하는 주 서부의 로키 산맥 지역은 영국과 미국 사이의 영토권을 둘러싼 분쟁이 그치지 않던 지역이었으나 1846년 영국이

그 지역의 영토권 주장을 포기했다.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가 1804~06년에 몬태나릍 탐험한 데 이어 모피 사냥꾼들과 모피 무역상인들이

이곳으로 왔다. 1841년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이 이곳에 세인트메리스미션이라는 최초의 정착지를 세웠는데, 나중에 스티븐스빌이라는 읍이

되었다. 1860년대초에 금이 발견되었고 후반에는 양·소 목축이 시작되었는데 이때문에 인디언들과의 끈질기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인디언들은 이주민들이 그들의 사냥터를 침범하고 들소를 죽이는 것에 반발했다. 1876년 리틀빅혼의 전투1에서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가 이끄는 제7기병대는 대패하여 전멸되었다. 이어 1877년에도 빅홀 분지 전투에서 조지프 추장이 이끄는 네페르세족 인디언들이 승리했다.

그러나 1877년 인디언들은 전투를 중단하고 보호구역에 정착하게 되었고, 1889년 몬태나는 미국의 41번째 주가 되었다.

지형학적으로 볼 때, 2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의 그레이트플레인스는 대체로 나무가 없는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평원 여기저기에 외딴 산, 나무로 둘러싸인 개울, 작고 동떨어진 산맥들이 있다. 서쪽의 북부 로키산맥에는 빽빽한 숲이 줄지어 있고 로키 산맥 분수령이

있다. 다른 주들과 비교해볼 때 몬태나 주의 배수는 독특하다. 왜냐하면 몬태나 주의 강들이 태평양, 멕시코 만, 허드슨 만 등 대륙의 3대 주요

분수계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기후는 건조한 대륙성기후이다. 1월평균기온은 -8℃이고 6월평균기온은 18℃이다. 평균강우량은 서부가

460㎜이고 동부는 330㎜로 적은 편이다. 따라서 습도도 대체로 낮다. 7월과 8월에 때때로 거센 우박이 쏟아지기도 한다.

주에서 큰 규모를 이루고 있는 소수민족 집단은 인디언뿐인데 그들 가운데 약 2/3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산다. 20세기초 북유럽에서 온 이주

가족들은 자영농장에 정착했고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온 이주민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자손들은 잘 동화했다.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두드러지게 많지만 모르몬교도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광산촌, 무역 중심지, 철도 교차점들이 도시로 발달했지만 아직도 대도시는 얼마

되지 않는다. 게다가 1970년 이래 도시 주변의 인구보다 농촌지역의 인구가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1970년대에는 주 전체가 급속도로

성장했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국 평균성장률의 절반도 채 안 될 만큼 성장이 저조하다.

가장 큰 수입원은 농업수입이다. 가축을 통한 수익이 현금수입의 절반을 차지하고, 그밖에 보리·밀·사탕무·귀리 등의 곡물이 나머지 절반을

차지한다. 석탄, 석유, 천연 가스 등이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들이고, 구리·인산염·질석·벤토나이트·모래·자갈·석고 등도

중요한 자원들이다. 상업용 삼림지가 560만㏊ 이상 있고, 상당한 비율의 노동인구가 제재업에 종사한다. 제조 활동은 천연자원의 가공과 관련

되어 있다.

몬태나 주는 자동차 운송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잘 짜인 고속도로망을 갖추고 있다. 시내 버스 노선은 3개 도시에만 있다. 문화활동은 많은

 수의 대학과 몬태나 예술원 및 몬태나 예술협회 등 2개의 주립기관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지역 인디언 기념행사가 공개적으로 열리며,

로데오 경기가 널리 성행한다. C. M. 러셀 박물관은 카우보이 예술가인 찰스 매리언 러셀의 작품들을 전문으로 전시하고 있다. 플레인스

(평원) 인디언 박물관이 브라우닝에 있다. 면적 380,848㎢이고, 인구는 100만이 안된다.

 

 

 

※ 미줄라(Missoula)는 미국 몬태나 주 서부 미줄라 군의 군청소재지(1866)이며 시이다.

컬럼비아 강의 지류인 클라크 강이 흐르는 비터루트 산맥 부근의 넓은 계곡(해발고도 982m) 가운데, 비터루트 강이 유입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에 처음 정착한 백인은 인근의 스티븐스빌에 세인트메리 선교회를 설립한(1841) 피에르 장 드 스메 신부였다.

미줄라는 1860년대에 워싱턴 주의 포트벤턴에서 왈라왈라 사이의 황무지 길인 몰란 도로변에 하나의 교역소로 생겨났다. 이전에는 헬게이트라고 불렸으며, 현재 이름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1883년 노던퍼시픽 철도의 분기점이 되고 1893년 몬태나대학교가 설립되자 발전이

촉진되었다. 경제는 제재와 제지, 사탕무를 이용한 제당, 낙농업, 농산품판매, 관광, 교육시설 등에 집중되어 있다. 롤로 국유림(미줄라에

본부를 두고 있음)와 클리어워터·비터루트·플래스레드 국립산림지대의 입구에 있고 미국 산림청과 몬태나 주 산림청의 지역 본부가 있다.

노던 산림화재연구소도 이곳에 있고 산림화재 소방수 가운데 연기탈출 요원들의 훈련소도 있다. 미줄라 요새(개척자들의 방어용 울타리)와 플랫헤드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다. 1885년 시가 되었고 인구는 50,000명 정도의 시골이다. 

 

또한 미줄라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제작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배경이기도 하다.

 

 

 

댄과 주디네 근처의 미줄라 거리.

 

주디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댄의 부엌에서 주디와 진미.

 

 

마당에 있는 트램플린.열심히 튀어오르다 옆의 창고 지붕에 자리를 잡았다.

 

 

 

 

...

  1. 1800년대 중반, 아직까지 백인들에게 빼앗기지 않은 땅은 중북부의 대평원뿐이었다. 남북전쟁으로 경황이 없던 백인들은 두 번의 ‘라라미 조약’을 통해 그 길을 지나는 백인 개척자들의 신변안전을 보장받았다. 대신 인디언들에게는 영토보장을 약속했다. 그러나 남북전쟁도 끝나고 수우족 보호구역인 블랙힐즈에서 금광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정복자들의 탐욕이 되살아났다. 미 정부가 인디언들에게 1876년 1월 31일까지 이곳을 떠나 보호구역으로 옮기라고 통보했지만 인디언들은 시한 내에 이주할 수 없었다. 미 정부가 남북전쟁의 영웅인 조지 A.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제7기병대를 급파하자 수우족의 최대 부족인 라코타족과 샤이엔족은 시팅불(Sitting Bull`1831~1890)과 크레이지 호스를 중심으로 1천여명의 전사가 몬태나주(州) Little Bighorn 강가에 모여 항전 채비를 했다. 1876년 6월 25일, 남북전쟁의 영웅 커스터 중령은 다른 부대와의 합류약속을 깨고, 먼저 인디언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협곡으로 유인된 기병대원들은 305명 전원이 몰사하고, 코만치라는 기마만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이후에도 시팅불은 후속 전투에서도 여러 차례 이겼으나 승리는 불가능했다. 그는 굶주림과 미군의 공세에 쫓겨 캐나다를 떠돌다가 1881년 항복했다. 9년 후 집에서 자신을 체포하려던 인디언 경찰의 총에 죽었다. 전투에서는 용맹했으며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아내와 자식을 살려주고, 비무장한 적에게는 무기를 건네준 후 다시 싸움을 벌인 '남자다운' 전사였다. 수우족은 그를 '인디언의 자존심을 지킨 전사'로 자랑스러워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