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야기

프랑스 항공전역 분석

無名人 the first 2013. 3. 15. 19:43

 

 

※ 이글은 2013년 1월 17일 "유용원기자의 군사세계"에 올렸던 글이다. 이 글에 따른 토론은 "유용원기자의 군사세계" 무기게시판을 참조하시기를 바란다.

 

 

1. 개전 시점에서의 양측 항공력

. 영국공군 제1선 전투기 1,911대 보유

영국공군은 영국본토와 7개소의 해외거점에 분산배치되어, 독일공군과 직접 대결하고 있던 영국본토 공군의 Fighter Command35개 비행대대가 예비기를 포함하여 959대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다우딩 대장이 적정선으로 생각했던 53개 비행대대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세부적으로 보면, Bf-109와 호각을 겨룰 수 있는 허리케인 347, 스피트파이어는 187대로 총 534대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복엽의 Gloster Gladiator, Gontrat, 쌍발 폭격기를 개조한 Blenheim 1형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해외 비행대에는 스피트파이어와 허리케인은 아예 배속도 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영국공군의 긴급과제는 계획되었던 `8개 비행대대의 증편(193912월 달성)과 동시에, 구식기를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허리케인, 스피트파이어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1939RAF는 재편성되어, 같은 기능과 임무를 가진 비행기들로 구성되는 큰 작전 단위인 사령부(COMMAND)"들로 나누어졌다. 주요 사령부들은 폭격기사령부(bomber Command), 전투기사령부(Fighter Command), 해안사령부(Coastal Command), 교육사령부 (Training Command)였다. 최초 Fighter Command는 영국본토를 3(후에 6) Group으로 나누어 부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1939년에 전쟁이 시작된 후에, 공중 공격으로부터 영국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아서 새로운 전투기들로 무장한 전투기 사령부는 전투기들을 4개의 비행전단(Group)” 로 나누었다. 각 비행전대는 영국의 할당된 지역을 방어할 책임을 맡았다. 이 비행전단들은 다시 관구대(Sector)”들로 나누어지고 지역 내에서 가장 중요한 비행장이 관구대본부(Sector station)"로 정해졌다. 각 지역 내의 여러 비행장들에는 각기 12대의 비행기로 구성되는 비행대대(Squadron)”가 있었다. 각각의 비행대대는 “A” “B” 로 불리는 2개의 비행중대(Fighter)”가 있어서 각 6대씩을 가졌다. 각 비행중대는 다시 3대씩 2개의 편대(Section)" 로 나누어져서 각각 "레드(Red)" "옐로우(Yellow)" "블루(Blue)" 또는 "그린(Green)" 이라고 불리어 졌다. 때로는 2개 이상의 비행대대가 합류하여 비행단(Wing)”을 구성하거나 3-5개의 비행대대가 합류하여 대형비행단(Big wing)"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 프랑스 공군 - 최강의 공군 그러나 들여다보면 미라쥐(신기루)

1차 대전 종료시 프랑스 공군은 83개의 전투비행대대와 1,392대의 전투기를 보유한 세계 제1급의 양과 질을 자랑했다.

하지만, 가상적이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판단했던 1920~3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 공군은 신형기의 보급면에서나 조종사의 훈련에 있어서 점차로 군기가 해이해지고 사기도 떨어져갔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말의 대공황은 프랑스 경제를 강타하여 항공 산업은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경기가 회복하기 시작한 1930년대 초 프랑스 공군전투기대는 숫적으로는 여전히 유럽 최고수준이었으나, 질적인 면에서는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D-510 드보아틴 같은 전금속제 단엽전투기와 같은 신형기종이 1935년에 출현하였고, 공군이 육군으로부터 독립되어 공군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나 정권이 불안정한데다 예산마저 전체 군예산의 ¼에 지나지 않아 확고한 항공정책은 결여되어 있었다.

그 좋은 예가 많은 사람들이 그 용도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던 AMIOT 143M, 다좌전투기 겸 폭격기 겸 정찰기와 같은 다용도기가 다수 존재했던 것이 그 좋은 예이다. (http://en.wikipedia.org/wiki/Amiot_143)

 

이러한 기종은 결국 프랑스 공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전투기 뿐만이 아니라 폭격기도 어이없을 정도로 구식기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이 무렵, 복엽기로부터 단엽기로 옮겨가는 세계 항공기의 발달추세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항공공업을 시찰한 사람들은 몇 가지 뛰어난 아이디어는 찾아볼 수 있으나 생산설비가 구식이기 때문에 신기술을 도입하여 우수한 현대적 군용기를 대량으로 배치하는 시스템이 결여되어 있다.”라고 지적했다.

1935년 독일이 재군비를 선언하자 프랑스공군은 이에 당황하여 매월 200대의 신형기를 생산, 배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제1차대전 시의 생산 라인을 개선하지 않았던 프랑스 항공산업으로서는 이 계획을 완수할 수 없었다. 전금속제의 인입식 바퀴를 장착한 단엽기를 생산하는 작업은 지지부진하여 좀처럼 계획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일부가 프리마스크라는 합판으로 되어 있는 약간 과도기적인 신형전투기 MORANE SAULNIER MS4051934년 주력전투기로서의 생산이 결정되었으나 그 양산형인 MORANE SAULNIER MS406C1이 실전부대에 배치되기 시작한 것은 4년 후인 193812월의 일이었다. 프랑스의 조종사들이 처음으로 MS-406의 조종석에 들어가 그 속에 배치된 여러 가지 장치에 넋을 잃고 있을 무렵, 독일에서는 이미 BF-109가 소련에서는 I-16 포리칼포프가 이미 대량으로 배치되고 있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실전경험도 쌓고 있었다.

 

 

동년인 1938년에 MARCEL BLOCH MB151(2)dewoitine D-520도 생산에 들어갔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급속히 감돌기 시작한 유럽의 전운에 초조해진 프랑스 공군은 급거 미국으로부터 Curtis Hawk-75A-1(P-36의 수출형)100대 구입하여 대타로 취역시켰으며 이어서 주문한 Curtis Hawk-75A-2, Curtis Hawk-75A-3의 댓수도 191대나 되었다. 이중 대부분을 차지한 것이 호크 75A-175A-2 버전으로 각각 4정과 6정의 7.5 mm 기관총을 장착하고 있어, 1정의 기관포와 2정의 7.5mm 기관총으로 무장한 MS-406에 비해 화력에서 약간 밀리는 것을 빼고는, 기동성, 상승력, 속도 면에서 앞서 있었다.

1939828, 2차 대전 돌입 직전의 프랑스 공군전투기대의 편성과 배치는 야간전투기대를 포함하여 10개 전대 550대였으나 최신예기이자 가장 성능이 좋았던 드보아틴(Dewortin)-520 전투기는 5월 개전 당시 일선에 배치된 수량은 1개 전대 36대에 불과하였다. 드보아틴 D-520 전투기의 최고속력 330 mphBf-109E와 엇비슷할 뿐 아니라, 선회전에서는 Bf-109를 능가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 주력을 차지하는 MS-406HAWK-75A는 독일공군의 BF-109에 비하면 분명히 성능이 처지는 비행기였다.

 

 

. 독일공군 전투기대 1,179대 보유

프랑스 전역에 투입된 독일공군 전투기대는 크게 두개의 항공군으로 나뉘어, 2 항공사단(Luftflotte)B 집단군에 배치되어 이를 엄호했고, 3 항공군은 아르덴느를 돌파하는 A 집단군의 진격로 개척을 위해 배치되었다. 이들 두 항공군의 규모는 324기의 Ju-87 수투카 급강하 폭격기와 1120기의 달하는 수평 전술 폭격기(Do-17, He-111, Ju-88), 42기의 Hs-123지상공격기, 호위 전투기는 Bf-109 : 1,016대와 Bf-110 : 248대로 구성되어 질과 양에 있어 영국과 프랑스 공군을 능가하고 있었다.

 

 

편제를 살펴보면, 독일 공군은 비행기를 그 기능에 따라 사령부는 구분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5개의 독자적인 항공부대, 항공군(LUFTFLOTTE)"으로 나누었으며 각각은 유럽의 할당된 지역에 대한 항공작전을 맡게 되었다.

1개 항공군은 약 1,000대의 전투기, 폭격기, 수송기, 정찰기로 구성되며, 4가지 종류의 비행기를 모두 보유하는 2개의 “FLIEGERKORP"로 다시 나누어진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다양한 종류의 비행기가 모였던 FLIEGERKORP는 점점 전문화 되었다.

FLIEGERKORP에는 약 80-120대의 비행기로 구성되는 임무부대인 ”GESCHWADER"3-6개 있다. GESCHWADER는 보유한 비행기 종류에 따라서 이름을 가진다. “JAGDGESCHWADER(JG)"는 전투비행단, ”KAMPFGESCHWADER(KG)"는 폭격비행단, “ STUKAGESCHWADER(ST.G)"Ju-87 급강하폭격비행단, 그리고 ”ZERSTORERGESCHWADER(ZG)"BF110 구축전투기비행단이다.

GESCHWADER는 약 30대로 되는 “GRUPPE(대대)"로 나누어지며 대게 한 GRUPPE는 같은 비행장에 같은 비행장에 배치되어 있다. GRUPPE3개의 ”STAFFEL(비행중대)"로 나누어지며 하나의 STAFFEL은 같은 종류의 비행기 9-10대로 구성된다.

       

 

 

 

 

 

 

 

2. 전투기의 대형(Formation)

독일공군 전투기들이 스페인 내전까지 편대구성의 기본 단위인 근접된 3(Keten) 대형으로 비행하다가 큰 피해를 입은 후에 독일의 에이스 베르너 묄더스는 더 거리를 두는 대형을 만들어서 시험했다. 또 그는 이전까지 약 30m에 불과하던 편대기 사이의 간격을 180~200 m 정도까지 대폭 늘였다. 이것을 슈밤(Schwarm)이라고 하는데, 4대의 전투기가 대형을 이루며 각 2대씩은 롯테(Rotte)라는 한쌍을 이룬다. 그 편대장은 조종술과 사격술이 가장 우수한 조종사가 되며, 항상 다른 전투기 3대의 앞에서 비행한다. 두 번째 비행기는 편대장을 방어하는 요기(Wingman)으로서, 그는 절대로 편대장 옆을 떠나지 않는다. 요기는 항상 태양이 있는 방향의 더 낮은 고도에서 편대장 옆을 비행함으로써 다른 비행기가 그를 바라볼 때에 태양을 바로 쳐다보지 않아도 되게 해준다.

요기의 반대쪽에는 고도차를 두어, 후상방에 있는 두 번째 롯테의 장기(Leader)가 위치하며, 그 옆의 더 높은 고도에 그의 요기가 위치한다. 두 번째 요기는 항상 태양 주위의 하늘을 탐색해야 하며, 그 방향에서의 적 공격을 경계한다. 슈밤은 더 넓게 퍼져있기 때문에, 적기가 발견하고 더 힘들고 편대내의 충돌사고 위험성도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한개의 슈밤이 400 -500 m 정도의 넓이를 커버할 수 있었으며, 각 편대원은 자신의 시계의 사각을 서로 보완해주는 효과를 보았다. 이에 따라 독일공군 전투기들은 그 후의 스페인 내전과 영국 본토 방공전 초기 단계에서 큰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

슈밤 대형은 공격 뿐 아니라 방어에 있어서도 강한 면모를 보였다. 가령 적기가 한개의 슈밤을 측면공격한다고 생각해 보자. 공격받은 로테는 일단 적기의 공격 방향쪽으로 선회에 들어간다. 로테 중 적기에 가장 가까운 전투기 한대는 적의 추격을 받게 되지만, 그와 로테를 이루는 전투기가 동시에 선회하면서, 적기 후방 200 m 거리에 위치하게 된다. 즉 로테는 언제나 같이 움직이며, 한대를 미끼로 아군기의 공격찬스를 주어, 적기를 샌드위치 시키게 되는 것이다. 또 후방의 로테는 고고도에서 태양빛에 은신해 있다가, 적기가 미처 발견하기도 전에 적을 강타할 수도 있었다.

슈밤의 두가지 모양. 작은 그림은 편대의 아래쪽에서 본 전경이다.

 

이와 달리, 두 개의 세계대전 사이에, 그들의 전투기는 호위가 없는 폭격기들을 공격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 영국은 V(VIC)-formation이라는 근접 편대 구성을 만들었다. 기본원리는 독일공군이 스페인에서 포기한 것과 같은 대형으로서 3대의 전투기가 서로 약 30 m 정도의 좁은 간격을 두고 3각형을 이루고 동고도로 비행하며 가운데 전투기가 다른 2대보다 약간 앞에 위치한다. 이 대형은 속도보다는 기동성이 돋보이는 복엽기에서는 유용한 대형일지 모르나 단엽기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즉 복엽기들이라면, 편대 비행중 적기의 공격을 받을 경우 V형의 각 꼭지점에서 전투기들이 일시에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적기와 각기 일대일 공중전에 들어가는데, 공중전 필드 자체가 협소할 수 밖에 없는 복엽기에게는 이 V형 대형이 안성 맞춤이었다. 하지만, 속도와 기동성이 대폭적으로 발전된 단엽기들은 밀집대형으로 비행하기 위해서는 아군기끼리 서로 공중충돌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기본적으로 속력을 낮추어야 했으며, 고속 편대 비행시에는 옆에 바짝 붙어 움직이는 동료기와의 거리에 신경 쓰느라, 가장 중요한 사주경계가 소홀해질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었다. 게다가 V형 편대형은 수평적인 개념의 삼각형으로 상하라는 개념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RAF 전투기들은 더 거리를 두고 비행하면서 영국의 편대를 더 빨리 발견할 수 있었던 독일 전투기들에게 쉬운 목표가 되고 말았다. 독일공군이 스페인 내전에서 얻은 것과 같은 실전 경험이 없었던, RAF 조종사들은, 영국의 전투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빅 대형을 포기하고 독일의 슈밤 대형을 도입하여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핑거 포(Finger Four)라는 대형을 사용했다.

 

 

 

 

 

 

 

3. 프랑스 항공전의 시작

대독전쟁의 시작으로 영국해외파병군(BEF)이 프랑스로 이동하였으며, 프랑스는 영국전투기 10개 비행대대의 파견을 추가요청 하였으나, 본국방위의 약화를 우려한 다우딩 대장은 허리케인 4개 비행대대만을 파견하였다. 이후 2개 비행대대가 추가 파견되어, 96대의 전투기를 파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기 전투에서 대량 손실을 입게 되자, 5124개 비행대대가 증파되었으며, 다음날 2개 비행대대 32대가 추가 파견된다. 하지만, 영국 공군이 프랑스에 파병한 전투기 중 가장 뛰어난 성능의 최신기가 허리케인 전투기였는데, 아돌프 갈란드는 후에 노획된 허리케인을 직접 탑승해 보고 형편없다라고 평했을 정도로 독일 Bf-109E 보다 한 단계 아래의 전투기였다.

한편 프랑스공군은 상대적으로 현대적 장비를 갖춘 기종을 전선부근으로 이동시키고 노후된 장비를 가진 비행대대를 후방으로 이동시킴과 동시에 MB-152 등의 신형기로 기종개편을 서둘렀다.

이후의 소강상태인 “Pony War" 기간에는 소규모 공중전만이 벌어진다.(pony war에 대해서는 http://user.chollian.net/~hartmann1/h-france1.htm) 참조

이동안 프랑스 공군은 필사적으로 전력의 증강과 현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래서 7개월 동안에 프랑스공군 전투기대의 규모는 23개 전대로 증강되었으며, 증강된 기체의 대부분은 신예기인 MB-152D-520 드보아틴이었다. 그러나 전투기대의 급팽창으로 인해 신참 조종사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으며, 그들이 신형기들을 충분히 조작할 수 있게 되기도 전에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급히 먹은 밥이 체합니다. 미리 미리 준비해야죠.

개전 당일을 기준으로, 독일공군의 주력은 BF-1091,016대였으며 대부분 신예기인 BF-109-E형이었다. 획일적인 대량생산과 훈련으로 조종사와 정비사들은 기체와 엔진 등에 대해 높은 숙련도를 보였으며, 기체부품과 연료, 탄약 등의 보급도 합리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맞서는 프랑스전투기대는 잡다한 단좌전투기 약 700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신참은 물론 고참 조종사들도 신형기에는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다. 영국공군 파견대는 96대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후에 증강이 되지만 축차투입으로 인해 전력의 증강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들 연합군 전투기들은 독일에 비해 숫적으로도 열세였지만, 성능면에서도 열세였다.

결정적으로 스페인 내전 이후 실전 공중전을 거치면서 쌓아 온 독일의 공중전 전술에 비교해 보면 프랑스와 영국 파병 공군의 그것은 일차대전 방식에서 별다른 변화가 없는 답보 상태였다.

 

 

 

 

1940510,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을 넘어 전격전을 시작하였을 때, 독일공군은 서부전선에 집중적으로 맹공을 가하기 시작, 침공과 동시에 프랑스의 주요 비행장들을 기습해, 다수의 항공기를 지상에서 파괴시켜 버렸다. 독일공군의 제1격을 탐지하지 못했던 국경지대의 영국과 프랑스 전투기대는 그 대부분이 기습을 받아 지상에서 파괴되었으며, 사령부로부터의 요격 출동명령도 늦어졌다. 역시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명제가 여기서도 증명이 되죠!

 

 

지상전역과 관련된 자료는 여기서 참고하시길...

http://user.chollian.net/~hartmann1/h-france3.htm

http://airwar.hihome.com/airwar/ww2-europe/part1/ww2-7.htm

512..... 이날은 독일 공군에게는 경이로운 항공전의 승리... 프랑스와 영국 공군에게는 지울수 없는 오명의 하루가 되어 버린다. 주 공격로인 아르덴느 보다도 훨씬 북부인 마스트리츠(Maastricht)와 리에주(Liege) 사이 공격선에 루프트바페의 공격을 집중해 유인 작전을 시작했다. 이것은 B 집단군의 진격 엄호라는 측면과 더불어 주공인 A 집단군의 아르덴느 돌파의 기습의 효를 극대화하려는 일석이조의 책략이었다. 벨기에에서 쾌속 진격하는 독일의 진격을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기들은 여러 차례 폭격을 시도했지만, 이들은 독일 요격기와 대공포의 사격에 줄줄이 격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측은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프랑스공군의 경우 개전 당일인 510일에만 49, 11일에 39, 12일에는 52대의 격추 보고를 받았다. 프랑스측의 손실은 조종사 12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공격목표가 주로 폭격기였던 까닭도 있었다.

당시 벨기에 북부 접경에 위치한 영국 파병군 사령관 고트(Gort)경은 본국에 위급합을 알렸다.

"우리에겐 항공기가 필요하다.... 전투기와 정찰기가 없이는 적의 진격을 예상할 수 없다. 이미 우리가 가진 항공전력의 50%는 괴멸당했다...."

 

그러나 런던에서는 아직 항공기의 추가 파병을 결정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초기 며칠은 연합군에게는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혼란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만신창이 된 영국 공군이었지만, 이것도 아쉬웠고, 프랑스 지휘부는 영국공군에게 계속 북부 리에주(Liege) 방어선에 전력을 집중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엄청난 자충수가 되어 버린다.

이사이 무주공산이 된 남쪽 아르덴느 삼림을 조용히 개척하던 독일의 주공 A 집단군의 기갑전력이 기나긴 숲을 벗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주공을 막아내야할 영국의 공군력이 다급해진 프랑스의 안달로 아르덴느와는 너무도 먼 북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클라이스트(Kleist) 장군 휘하의 구데리안(Guderian)과 라인하르트(Reinhardt)가 이끄는 독일 기갑 전력이었다. 기만과 상황인식의 중요성

게다가 네덜란드와 벨기에서 독일 B 집단군의 매서운 초기 유인 공세로 프랑스와 영국은 자신들이 예상한 방향이 맞아 떨어졌다고 생각하며 전력을 프랑스 북부에 두고 있었으며, 공군 역시 북부 지상군의 지원을 위해 온힘을 다쓰고 있었으니, 이곳은 완벽한 기만전술에 의한 공백 그 자체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안전한 후방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남부 아르덴느 지역을 맡고 있다고 유유자적하던 프랑스 제 2군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연이어 달려온 독일 수투카를 위시한 폭격기들이 Bf 109의 호위를 받으며, 이들을 괴멸시켜 나갔다.

특히 독일 제 27 전투 비행단 (JG 27)의 활약이 눈부셨다. 이날 총 340회 출격을 기록했는데, 이것은 Bf 109 한대당 하루 4-5회 출격을 한 셈이며, 이를 통해 총 28기의 격추를 달성했다. 다른 비행단 역시 JG 27에는 미치지 못하나 각기 20 여기의 격추를 달성해냈다.

개전 3일만에 영국 공군 파병 비행단의 절반에 육박하는 200 여기가 격추 혹은 지상파괴되고 만 것이다. 비록 영국 공군이 반격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즉 페어리 배틀(Fairey Batle) 경폭격기 32대가 진격의 선두를 강타하려 했지만, 독일 Bf-109들의 요격으로 그 절반인 13기가 줄줄이 격추되어 버린 것이다.

512일 뮤즈강변에 도달한 독일군은 513일 강 서안의 방어선에 집중적인 폭격을 가해 포병대와 방어진지를 파괴하고, 14일 도하를 시작한다.

 

514,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뒤늦게나마 항공전력을 스당에 집결시켰다. 이차대전 이후 최초의 대규모 항공전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백기의 양측 항공기들이 스당을 비롯한 뮤즈강 상공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피말리는 일대 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독일 조종사들은 포니워 기간 동안, 프랑스와 영국 공군을 상대로 탐색전을 펼치는 기간 동안, 프랑스 공군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한 상태였고, 또 스페인 내전 이후, 폴란드 등지에서 이미 실전 경험까지 끝낸 엘리트였으며, 세계최강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었다. 공격의 선봉에 선 투지에 불타는 이들을 막을 자는 프랑스 상공엔 아무도 없었다.

 

가장 뛰어난 전과는 JG 53에 의해 달성된다. 전설의 에이스 베르너 뮐더스가 이끄는 제 3 그루페가 20기 격추를 달성했으며, 이날 뮐더스 개인적으로도 2차대전 이후 10기째 격추를 달성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뛰어난 전과는 JG 53 예하 제 1 그루페가 달성했다. 이들은 단 하루만에 적기 39대를 격추시켰고 이중 스페인에서 이미 8기 격추를 달성한 에이스 한스 칼 마이어(Hans Karl Mayer 영국의 항공전에서만 22기 격추를 달성해 8위의 에이스로 랭크된다. 후에 통산 46기 격추를 달성한다)는 스당 상공에서 하루만에 허리케인 1기를 포함해 총 5기 격추를 달성해 서부전선 최초의 전설을 만들어내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필사적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독일군이 뫼즈강을 돌파하자 영국공군은 뫼즈 강을 가로지르는 부교를 파괴하려고 했다. 514일 출격한 71대의 Fairey Battle 경폭격기 중 40대가 격추되기도 했다. 이날 스당에서 격추된 연합군의 항공기는 90여 기(이중 27기는 영국의 허리케인기)에 달했으니 루프트바페의 완벽한 승리였다.

514일 스당의 항공전에 대해 훗날 영국 왕실 공군 공식 항공전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전선 상공의 공중우세 장악에는 실패하여, 독일공군의 진격은 저지되지 않았으며, 개전 5 일만에 거의 모든 프랑스와 영국 원정군의 항공전력이 바닥을 드러낼 때, 프랑스의 레노 수상은 처칠에게 더 많은 전투기 대대, 구체적으로 25개의 전투기 대대를 추가 파병해 줄 것을 요구했었다. 처칠이 정말 이것을 실행에 옮기려 했을 때, 다우딩 대장은 515일의 전시내각에 출석, 처칠 수상에게 이 요청을 수락할 경우 영국 자체의 방공망에 구멍이 생길 것이라고 증언, 추가 파견 중지를 요구했으나 다음날에는 방침이 급변하여 4개 비행대대가 증파되고, 이어서 6개 비행대대의 추가 증파명령이 처칠 수상으로부터 직접 떨어졌다. 하지만, 영국 본토도 독일의 공격으로 가용비행장이 감소되고 있었기 때문에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3개 비행대대씩을 교대로 파견할 수밖에 없었으나, 허리케인 비행대대는 결국 전대가 동원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증원공군은 축차투입으로 달군 돌에 눈송이같은 미미한 효과만을 거둔 채 영/불 연합군은 제공권을 되찾아 오는데 실패했다. 국지적 숫적 우세의 중요성과 축차투입의 위험성

확보된 제공권의 강철우산 아래서 구데리안의 기갑부대는 저항을 극소화하며 515일까지 부교를 통해 뮤즈강 도하를 성공리에 마무리 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제 9군이 늦게나마 반격을 시도하려했지만, 이미 도하를 마친 독일에게 목표지점을 선점당해 프랑스군의 방어선은 지리멸렬하며 무너졌다. 또 뮤즈강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의 3개 기갑사단 모두가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못해보고 괴멸되어 버리고 만다. 즉 제 1 기갑 사단은 플라비옹(Flavion)에서 연료 부족으로, 2 기갑사단은 히르송(Hirson)역에서 하차 도중에, 3 기갑사단은 스당 남쪽에 고정배치되어 있다가 기습공격을 받고 각각 괴멸된 것이다.

 

이날 프랑스의 레노(Paul Raymaud) 총리는 처칠(515일 체임벌린의 뒤를 이어 처칠이 영국의 수상이 된다)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패배했습니다. 스당을 점령당하면서 전투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전화상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그 역시 이후 불과 1주일도 채 안되는 기간에 프랑스의 해안까지 독일의 진격이 뻗쳐나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처칠은 레노에게 더 많은 전투기를 보내기로 약속했으나, 영국 전투기 사령관 휴 다우딩은 강력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 훗날을 위한 다우딩의 예견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대규모로 예상되던 영국 공군의 추가 파병은 다우딩의 반대로 허리케인 전투비행대 8(기존의 4개 비행대까지 합쳐 도합 12개 허리케인 비행대가 영국에 파견된 셈이다)를 비롯해 구식 글라디에이터 비행대 몇개에 지나지 않았으며, 영국 공군의 대규모 피해를 줄여 영국의 항공전을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A집단군이 뮤즈강 도하를 마친 515, 2주이상은 버텨 줄줄 알았던 네덜란드가 항복하면서, 독일 제 2 항공전대는 벨기에를 경유해 프랑스 북부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으며, 이로써 프랑스 북부에 몰려 있는 연합공군은 좌우의 협공을 받게 된 것이며, 전멸의 위기는 하루하루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루프트바페의 공세를 등에 업은 독일 지상군의 진격이 너무도 빨리 이루어지면서 웃지 못할 사건들이 속출했다. 오전에 루프트바페 폭격기들이 프랑스 비행장을 폭격해 연합군 항공기를 파괴하고 활주로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나면, 오후에는 독일 지상군이 그 비행장을 점령했고, 독일 전투기들은 자신과 동료들이 불과 몇 시간 전에 탄흔 구멍을 여기 저기 뚫어 놓은 활주로에 위험을 무릅쓰고 착륙해야 했다. Bf-109는 착륙 어렵기로 소문난 전투기로 조종사들은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JG 2 소속 11기의 Bf 109 들이 초계 비행을 마치고 전방 비행장에 착륙을 시도했으나, JG 27 비행단이 이미 프랑스 비행장을 점령하고 난 뒤라, 하는 수 없이 인근의 프랑스군이 철수해 버려진 비행장에 임시 착륙을 감행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들 전투기 조종사들이 착륙을 마치고, 비행장 주위의 숲을 수색하던 중 뜻밖에도 프랑스 패잔병들을 포로로 잡게 되는데, 이중에는 프랑스 군단장 1명과 사단장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다.

 

프랑스는 숫적 질적으로 부족한 전력으로 루프트바페에 대항해 보려했지만, 거침없는 독일의 진격에 계속 후방으로 기지를 옮겨가며 패주해야만 했고, 특히 통신의 두절과 보급의 악화로, 이륙 후에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프랑스 전투기 중 일부는 연료가 떨어지고, 비행장까지 적에게 접수 당하자, 들판에 동체 착륙해 전투기를 포기하고 조종사는 달아나는 상황까지 자주 벌어졌다고 하니, 이런 전쟁의 승패는 이미 초반에 결정났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프랑스의 기갑사단들마저 괴멸시켜 버린 구데리안은 프랑스의 중앙을 관통하며, 쾌속의 진격을 계속했다.

519일 생 캉탱(St. Quentin) 점령, 다음날인 20, 훗날 독일과 연합공군간의 처절한 공중전의 기지가 될 운명의 아브빌(Abbeville)까지 함락.....

드디어 520, 개전 후 단 10일 만에 240 마일을 진격해 도버해협에 도달함으로써 중유럽의 거인은 낫질에 의해 양단되고만 것이다. 영국 원정군 소속의 허리케인과 블렌하임 비행대들도 20일을 전후해 전원 영국본토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날부터 프랑스 해군의 항모기와 수상기도 육상으로 전향하여 제1선에 투입되었으나 별 도움은 되지 못하였다.

한편 프랑스 공군은 초기의 공중전에서 주력기종이었던 MS-406C1은 추력부족으로 상승력과 수평속도가 BF-109E보다 상당히 떨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져 이들을 보유하고 있던 전투기대대도 급히 MB-152로 기종전환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후방보급체계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MB-152의 기체와 부품은 각 전투기대들이 서로 먼저 사용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통상적으로는 시험비행, 사격 테스트 등의 각종 점검을 마치고 나서 실전부대에 인도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 시기의 MB-151MB-1529양기종은 엔진만이 다르다)는 기체가 완성되기 이전부터 각 부대가 경쟁적으로 인수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 인도된 358대의 MB 전투기 중 157대에는 프로펠러가 붙어있지 않았다. , 장부 상으로만 배치된 것이었다. 그래도 인수받았던 것은 정식절차를 기다리고 있다가는 인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초조감 때문이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수요에 따라 마르셀 브로크사는 월 100대 생산을 목표로 양산을 추진하였으며, 120대를 생산한 달도 있었다. 그러나 120대 중 95대는 프로펠러가 없었으며, 나머지 25대에는 프로펠러가 달려있기는 했지만 조준기가 장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전력상 도움은 되지 못하였다.

미국에서 구입한 Hawk 75A형은 조종성이 양호하고 고장이 적어서 조종사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속도가 느리고 무장도 약했기 때문에 D520으로 바뀌었다.

최우수기종으로 간주되었던 D5201시간 당 1대의 생산율로 증산되었으나 역시 문제점이 있었다. Bf-109와 비교할 때 생산회사 목록표 상으로는 성능에 큰 차이가 없었으나 전력적으로는 열세였다. 특히 조종사와 정비사가 이 전투기에 익숙치 못한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개전 시의 프랑스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전투기는 성능이 떨어지는 잡다한 구식기와 성능은 우수하나 각종 결함을 지니고 조종사들조차 익숙치않은 신예기로 대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결국 덩케르크 해안에서 영국 본토로 철수하게 되었을 때, 영국 전투기 사령부는 처음으로 스피트파이어를 투입하였다. 하지만, 다음 단계의 결전을 고려, 본작전에만 전력을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약 200대를 나누어 상시 2개 비행대대를 상공에 체공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공군기가 철수부대를 습격하여 영공군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느냐?”라는 비난과 질책을 받기도 하였다. 결국 덩케르크에서 527일 시작된 철수작전은 62일에 종료되었으며, 프랑스는 616일 항복하여 프랑스 항공전은 끝나고 말았다.

 

프랑스 항공전에서 프랑스 공군은 적기 격추 684대를 기록하였으나 조종사 201명이 전사하고, 부상 231, 포로 31명의 손실을 입었다.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것은 성능은 최신예기보다 떨어졌으나 이미 조종사와 정비사들이 항공기에 대해 익숙하고 군수체계가 확립된 HAWK기를 장비한 GCI-5로서 이 비행대는 16대를 격추한 아카르의 뒤를 이은 마랭라메슬레’(20)라는 우수한 지휘관에게 통솔되어, ‘뜰랑스’, ‘페리나등의 에이스를 거느리며 510일까지 6, 510일부터 항복까지 부대단위로서 71대를 격추한 반면, 전사자는 단 1명 뿐이었다.

영국군은 공중에서 허리케인 75, 지상에서 120대를 상실하였으며, 덩케르크 철수작전에서도 99대를 상실하였다. 이것은 영국본토 북부 방공작전에 투입된 3개 비행대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전투기대가 참전한 것인데도, 축차투입으로 효과를 못보고, 막대한 손실로 인하여 전투기사령부의 전력은 현저히 저하되었다.

, 덩케르크 철수 직후인 65일 전투기 사령부의 제1선 보유기는 466(이 중 331대가 스피트파이어와 허리케인)까지 떨어져 있었다.

 

 

 

 

4. 프랑스 항공전에서 얻은 전훈

. 연합국 공군은 근대적인 1선기의 보유 댓수도 적은 상태에서 분산배치되었음. 그리고 그마저 지상에서 초전에 파괴되고, 축차투입으로 소모되었다.

 

. 영국공군과 프랑스 공군의 폭격기사령부는 전선 너머 적의 인프라를 파괴하거나 국민의 사기를 꺾을 목적으로 전략폭격에 집중하고 있었다. 양국은 근접항공지원을 하기에 적합한 급강하 폭격기를 구배하기를 거부했으며, 육군과 합동으로 작전을 실시하지 않았다. 영국같은 경우 근접항공지원을 공군의 매춘이라고 까지 매도했다. 전략폭격은 장기간의 소모전과 총력전에 적합한 전략이었다. 따라서 전술폭격기와 공격기가 매우 구식으로 약체여서, 강력한 Bf-109의 공중엄호로 전선 상공에서의 공중우세를 장악한 상태에서 슈투카의 근접지원을 받으며 진격해오는 독일군 기갑부대에 타격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MS-406D-520 드보아틴이 그 임무를 맡게 되어 본래의 공중전 임무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양 기종 모두 장갑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액랭식 엔진을 장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공격에서 냉각기에 1발이라도 피탄되면 귀환이 불가능했다. 독일군의 대공포화는 정확하고 파괴력이 강하여 이 시기에 있어 프랑스 공군 전투기대 상실원인의 70%가 지상공격 시의 피탄에 의한 것이었다.

반면, 독일공군은 지상군이 전선을 돌파하는데 도움이 되는 전술폭격에 훨씬 더 능했다.

또한, 기습과 축차투입 등으로 인하여 지상전선 상공에서의 공중우세를 독일에게 내주고 말았다. 아르덴느부터 덩케르크까지 지상군이 기억하는 것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독일군 폭격기/전투기들의 엔진음과 급강하하는 사이렌 소리, 그리고 폭발음과 기총소사음이었다. 근접지원으로 충격을 받고 마비가 된 상태에서 집중운용되며 전선을 돌파해오는 기갑부대에 끊임없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 평시 전력 양성을 위한 훈련과 군수지원체계의 낙후 조종사와 정비사가 신형전투기에 익숙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손상에도 수리에 시간이 걸리고 부품의 입수도 곤란하였다. 특히 연일 계속되는 후퇴전투 때문에 그 혼란은 가동률을 더욱 저하시켰다.

항공기 생산은 절정에 달해 생산댓수가 손실댓수를 상회하고 있었으나 필요한 전선의 기지까지 배치하는 수송체계가 없었다. 6월에 파리가 함락되고 패탱 원수가 항복문서에 조인을 마쳤을 때 남아있는 가용기 댓수를 조사해보니, 개전시보다 많았다. 프랑스 공군은 전투에서 패한 것이 아니라 지상전의 급속한 패배에 따라 당황하여 궤멸된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로는 비점령지역에 남아있던 다수의 항공부대가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지 않아 원래 주둔기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 장기에서 남아있는 말들이 많았음에도 상대방의 묘수에 휘말려 외통수를 맞은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 지휘관의 중요성 : 독일공군의 고위장교에는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속되었다는 것이 능력의 징표였던 Milch와 예손넥(Jeschonnek : 육군대학 수석졸업), 케셀링 등으로 대표되는 일급군인 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연합국공군의 고위장교 가운데에는 출세에 실패한 뒤 다시 시작해 보려고 육군을 떠난 탈락 후보자가 아주 많았다.

독일 공군 장교와 육군장교는 공통분모가 있는 훈련을 받았고 스페인 내전과 폴란드 전역, 노르웨이 전역에서의 실전 경험을 보유하였으므로 독일군의 공지작전 전술의 조율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독일군 10개 기갑사단의 참모진은 자기들이 항공지원을 요청하면 항공지원이 제때 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어느 곳에서 어떻게 항공지원을 요청할 지를 알고 있었다.

반면 연합군 측은 유기적인 협조나 합동작전은 고사하고 자신들의 비행대가 어디에 있고, 이륙후에는 어디로 가야할지도 지시하지 못했다.

 

. 숙련된 승무원의 확보 대전 말기와 달리 독일 측은 충분한 숫자의 숙달된 항공승무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현역으로만 총 1만명의 승무원과 더불어 소집할 수 있는 노련한 예비역 조종사는 더 많이 있었다. 하지만, 영국공군의 경우 전투기사령부는 겨우 1450명의 조종사를 확보하고 있었다. 독일 측이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최고 기량의 조종사들을 투입한 반면 연합국은 전투의 중간에 존다는 것조차 사치였다.

전투경험이 있었던 다수의 조종사들에 의해 창안된 실전적 전술로 인해 독일군은 연합군보다 기습에 성공한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2차대전에서 격추 당한 조종사 중 80%는 적기의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일격필살의 기습에 격추되었다는 통계가 증명한다.

 

. 중앙집권적 통제와 분산통제의 차이 : 독일공군이 항공전력의 속도와 빠른 템포, 장거리 전개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 통제를 실시했던 반면, 연합군은 각 지역, 방어군별로 병력을 분산배치 운용하는 한편, 예하 지휘관들에게 모든 지휘권을 위임하여 전력의 집중과 효과적인 투사가 불가능했다.

 

. 항공기술과 성능의 차이 : Bf-109에 대해, 기타 항공기에 대해서도 연합군의 항공기가 기술적/성능적 우위를 지닌 것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전략폭격기 전력은 영국 측의 우위였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차이도 미미했으며, 전역의 특성상 전략 폭격기 전력이 사용될 기회가 없었다.

 

이미 국지적이고 예외적인 전투들을 제외하고, 전반적인 항공전투에 있어서 기술의 열세를 투지나 전술로 극복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난 것이다.

 

 

 

 

 

당시의 항공기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의 홈페이지들을 참조하시길

http://airwar.hihome.com/gwp/menu-ww2.htm

http://user.chollian.net/~hartmannshim/planeframe.htm

 

 

 

John Keegan, 류한수 역, 2차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2007. 1. 3.

작전사령부편, 창공의 에이스, 작전사령부, 1988. 12.

맥스 부트, Made In War - 전쟁이 만든 신세계, 플래닛미디어, 2007. 12. 14.

유승식, 독일공군의 에이스, 도서출판 모델 팬, 1995. 12.10.

http://user.chollian.net/~hartmannshim/main.htm

http://airwar.hihome.com

이밖에 각종 잡다한 자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