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야기

제 2차 대전시 함부르크 및 드레스덴 폭격의 목적과 효과 -과연 정당한 전쟁 수행이었는가?

無名人 the first 2006. 11. 6. 22:00


Ⅰ. 서  론

  1. 연구의 목적

  제2차 세계대전은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등장한 항공기와 전차 등의 신무기가

새로운 전술과 접목되면서 기존의 전쟁수행 방법을 바꾼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무기와 전술의 접목은 효율적인 전쟁수행에 기여함과 동시에 전쟁의

속도와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또 다른 신무기들의 사용의 한 형태는 기존의 특정

전선에서의 전투를 전후방이 따로 없는 국가 총력전의 형태로 바꾸었고, 대량의

비전투 민간인의 死傷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가 대전 중 미영 전략

공군과 독일공군에 의하여 영국, 독일, 폴란드와 일본에 대하여 수행된 전략폭격

전술 중의 하나인 도시폭격(지역폭격)이며, 이것은 결국 1945년 8월 6일과 9일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떨어짐으로서 마무리되게 되었다.

 2차대전 기간동안의 독일과 일본에 대한 연합전략폭격전역은 그 방대함과 복잡성

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빛나는 군사작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그 뒤의

이면에는 전쟁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고한 민간인들의 대량 살상이

있었다. 두헤로부터 이론적 근거가 시작된 제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에 의해

수행된 대표적 도시말살 폭격작전인 함부르크 및 드레스덴 폭격의 원인과 경과를

연구하여 이들 도시폭격이 과연 전쟁 수행에 있어서 필수적이었는가? 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고도의 정치수행의 부산물이었는가? 도덕적으로 면책이 될 수 있는

사안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연구의 범위 및 방법

   효율적인 연구를 위하여, 범위는 함부르크와 드레스덴 폭격의 기안과 배경,

결과와 사후분석으로 한정하고, 결론 도출을 위한 연구방법은 연합국 공격의

당위성 부여를 위한 두 도시의 군사, 경제적 목표의 파악과 독일의 민간부문 전쟁

수행능력에 따른 군사적 요인과 당시 전황과 소련과 연합국과의 관계에 따른

정치적 요인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Ⅱ. 폭격의 시작

  1. 군사적 배경

   가. 사상적 배경

    (1)두헤1)의 전략 폭격 사상

  두헤는 항공전 기초에 관하여 처음으로 종합적인 기술을 시도한 제공권(Command of the Air)에서 제공권의 획득이 곧 승리를 의미하며, 국가를 방위하기 위해서는 전시에 제공권을 획득할 수 있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항공력이 있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제공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적을 공중이나 작전기지, 생산지 등 어떤 곳에서든지 공격하여 적의 모든 항공 수단을 박탈해야 하며 이러한 종류의 파괴는 오직 공중이나 적국 내부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지상군이나 해군의 무기가 아닌 오직 항공무기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지상군 및 해군의 점차적인 축소로서 제공권을 획득하기에 충분할 만큼 상대적인 항공력을 증강시킬 수 있으며 국가방위는 오직 적절한 힘을 가진 독립적 공군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음을 기술하였다.

  미래전 양상(The Probable Aspects of the War in the Future)에서는 과거 역사의 교훈과 과학기술의 진보로 인한 장차전의 전쟁성격에 대하여 상세히 논의하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은 종전의 전쟁과는 달리 병력만 고갈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 국가의 생사를 건 투쟁이었으며 승리는 독일군을 격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독일국민의 정신적 및 물질적 여유를 고갈시킴으로써 달성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전통적 전쟁관에 항공력을 추가하였으며, 이러한 항공력은 전쟁을 더욱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고 전쟁종결을 앞당길 것임을 주장하였다.

1900년대의 전쟁(The War of 19C)은 가상의 항공전(프랑스 대 독일)에서 프랑스 방어망을 독일 전투기가 파상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극화(劇化)한 것으로, 지상목표물에 최대한의 피해를 주기 위하여 공격항공기를 대량으로 운용하고 화력집중 원리에 따라 단 한번의 공격으로 최대의 손실을 가할 수 있도록 항공력을 운용하였으며 프랑스 도시의 폭격을 "접근할 수 없는 화로"로 표현하였다. 즉 그는 항공기에 의한 폭격이 가공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이를 바탕으로 적의 항복을 강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두헤는 항공전략사상의 선구자 역할을 한 군인으로서 공중을 ‘제3의 전장’으로 표현하고 육. 해군 전력에 대한 공군력의 우수성을 정당화 시켰으며 새로운 전략으로 획기적 전환을 마련하였다. 세계 열강이 두헤의 사상을 따랐으며 특히 영국공군, 미 육군항공대 그리고 독일공군 교리에 항공력의 기초와 이론에 대한 논리를 제공하였다. 또한 공군의 독립에 관한 군 조직 및 운용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공군이 타군으로부터 독립되고 항공력이 장차전 승리의 결정적 수단이 될 것"이라 예언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몇몇 오류에도 불구하고 1, 2차 세계대전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 타당성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항공력은 본질적으로 전략적이며 공세적인 전력이다. 전쟁과 평화는 전쟁의 전략적 수준에서 결정되고 조직, 기획, 지원 및 지휘된다. 육군은 전투승리의 누적이 그들을 결정적이며 전략적인 작전위치로 격상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적 육군에 집착함으로써 전술적인 수준으로 전락되었다. 해군도 또한 어느 정도는 전쟁의 전술적 수준에서 싸운다고 비판되어진다. 항공력은 전략적, 작전적, 전술적 수준의 전선을 압박함으로써 변화를 가져왔다. 항공기는 통상 전략적 수준의 효과를 달성하는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육․해군과 지상 장애물 위를 비행하여 상대국가의 핵심부를 강타할 수 있는 능력은 치열하고 장기적인 지상전투와 치명적인 해군 봉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준다.“


(2) 트렌챠트(Hugh M. Trenchard)2)의 사상

  트렌차드는 영국의 독립된 공군을 창설하고 유지시킨 진정한 항공인이었으며 항공전략사상의 개척자였다. 그는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독립된 군으로서 영국공군을 유지하기 위하여 헌신적인 열정과 뛰어난 전략적 식견을 가지고 육․해군성과 경제부처 등의 강력한 반대자들과 투쟁하였다. 1924년 영국은 어떤 대규모 전쟁에도 참전하지 않을 것을 가정한 10년 규정(10 Year Rule)을 적용하여 공군을 1/10으로 감축하였으며 빈약한 국방예산의 17%만을 공군에 배정하였다. 더구나 해군과 육군은 다시금 공군을 폐지하고 자군 내에 항공부대를 가지려고 하였다. 트렌차드는 이에 대해 과거의 고정관념을 과감히 탈피한 공중통제(Air Control) 개념을 고안하여 대처하였다. 핵심은 "평시에 있어서 공군력은 어느 군보다 가장 경제적으로 운용될 수 있는 새로운 전력이 된다."는 것이었다. 트렌차드의 지지자인 쳄버린 하원의원은 "우리는 공군이 지․해상군과 다른 독자적인 임무나, 이들과 관련되는 매우 중대한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무한한 잠재력과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자적 활동능력을 갖고 있음을 믿고 있다. 우리는 공군의 능력을 절대로 얕보아서는 안될 것이며 장차 영국이 큰 위기에 처하게 될 때 육․해군보다 공군력에 의해서 국토가 보존되어질 것임을 확신하는 바이다. 현시점에서 공군을 폐지하여 육․해군성이 다시 항공기를 가지게 한다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견해를 같이 해 주었다. 리델하트도 결국은 "만약 우리가 모든 방면에서 강해지려 노력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방면에서도 충분히 강해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적절한 육군과 지상의 전술공군을 보유해야 하지만 우리들의 최선의 승부처는 공군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만약 트렌차드가 권고한 방침에 맞는 군대를 보유할 수 있다면 나는 침략자들을 저지시키는 일을 아주 기쁘게 떠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공군력의 상대적 중요성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어느 정도 수정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트렌차드의 주요 항공전략사상은 전략폭격사상으로 그의 이론은 공군 참모총장 재직시 더욱 원숙해졌다. 그의 사상을 종합해 보면 첫째,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제한된 방어는 국민의 사기를 위해 유용하다. 즉 "영공의 완전한 방어는 불가능하므로 방공임무에 전념하여 항공력을 운용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의 낭비이며 항공력 운용의 부정적 측면이다. 따라서 항공력은 지속적으로 공격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둘째, 공중우세는 승리를 위하여 사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항공력은 고유의 특성상 전략적이며 공격적인 무기이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육․해․공 3군의 목표는 모두 동일하여 적국을 패배시키는 것이며, 단지 육․해․공군 중 어느 한 군대의 힘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국가의 육군도 이러한 일을 하려면 적의 육군을 패배시키는 사전 단계가 거의 필수적이다. 그러나 공군은 적국을 패배시키기 위해 반드시 전선의 적 군사력을 먼저 격멸시킬 필요는 없다. 공군력은 이런 중간단계 없이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며 적 해군과 육군의 상공을 가로질러서 적의 방공망을 침투하여 적의 전쟁의지를 유지시키는 생산 중심지와 교통․통신을 직접 공격할 수 있다." 넷째, 전략폭격의 목적은 적의 전쟁능력 및 적국 국민과 정부의 사기를 말살시키는 것이다. 다섯째, 항공력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으나 항공력은 지상군을 위한 진격과 전투경계선의 확장에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 준다. 여섯째, 전략폭격은 국제법에 의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즉, 트렌차드는 전략폭격의 도덕성도 아울러 강조한 것이다.


  (3) 빌리 미첼(Billy Mitchell)3)의 사상

  미첼은 본래 사상가는 아니었으나 실전 경험 및 선진 유럽의 항공전략 사상과 지식을 습득하여 미국의 방위 문제를 근간으로 전략적 사고를 통해 그가 지녔던 이상을 구현하였다. 미첼의 항공력 사상은 전후기로 구분되는데 전기(1918년 중반 ~ 1920년)에는 미래전은 공중에서 시작되고 지상에서 종료되며 여기에 해군과 보조적 항공대 역할이 있으며, 공중우세를 획득하기 위하여 격렬한 공중전투를 치러야 함을 주장하였다. "핵심 중심부(Vital Center)"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전투기 엄호가 필요하며 공격 우선 순위는 적군-군수시설-산업시설-국민의 의지라고 하였다. 후기(1920년 후반 ~ 1936년)에는 전략적 항공력은 주된 지상군 작전 없이도 승리를 보장하는 전력이며, "점진적으로 적의 전력을 감소시켜 적을 기진맥진하게 만들기보다는 핵심 중심부를 강타함으로써 가능한 최소의 손실로 적에게 자국의 의지를 강요하는 수단"임을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런 임무에는 보조적 항공대 또는 항공모함은 필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핵심 중심부(Vital Center)" 공격순위는 적군의 의지-산업시설-군수시설-적군 순서로 변경하였다.

  미첼은 미국 항공계의 개척자이며 항공력의 십자군 용사로서 그리고 항공사상의 가장 중요한 대변가로 추앙 받고있다. 짧은 군 경력동안에도 미첼은 새로운 경로를 채택하고 새로운 기준을 세웠으며 후대의 주요 지휘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미첼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전망을 제안했을 때 그는 20년 이상 앞서 있었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첼이 다가올 위험에 대한 해답이 공군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미국의 항공발전을 위하여 정부와 여론을 상대로 항공전략사상을 지속적으로 전파하고 당시 권력층에 있는 보수세력과 투쟁을 계속함으로서 현재 세계를 이끄는 미국의 원동력이 된 미공군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미첼이 육군성, 해군성과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언론은 "공군력이 현재의 지배적인 군사요소이고 육군 및 해군은 그 아래에 있다."는 그의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미첼리즘(Mitchellism)"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사고의 단정성, 예측의 정확성 그리고 그가 기꺼이 감수한 위기와 희생은 공군력의 발전을 이끌어 내었고, 후계자들은 "미첼리즘(Mitchellism)"에 새롭고, 더 차원 높은 그리고 전체적으로 동시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핵심중심부에 신속하게 도달하여 그 목표들을 무력화시키거나 파괴할 수 있는 항공력의 도래는 과거의 전쟁수행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양상을 가져왔다. 이제 전쟁터에 있는 적의 주력 육군부대는 일시적 목표이고 실질적 목표는 핵심중심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영국공군 폭격기사령부의 작전 및 전술적 배경

  영국공군에게 있어서 전략폭격은 공군의 존립여부를 결정하는 핵심요소로 간주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시부터 시작하여 영국공군은 전략폭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갖게 된 데에는 1차대전에서의 체험이 영향을 미쳤다. 당시 독일군은 고타 폭격기와 쩨펠린 비행선 등을 이용, 런던과 그 밖의 영국도시를 공습, 약 400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14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사실을 주목한 것이 휴 트렌챠트였다.

  초대 공군사령관이었던 트렌챠트 공군대장은 1차 세계대전시의 독일본토 보복폭격의 경험에 입각하여 참호전에서의 가공할 만한 사상자를 공군력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극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영국은 1918년 4월 독립공군을 창설하였다. 따라서 이미 1924년에 공군참모부 소속 장교들은 적국을 공격할 “특정한 장거리 공격전력”을 이용하여 전쟁 발발과 동시에 인구밀집지역의 군사목표와 적의 핵심 산업시설을 폭격하여 심리적 효과를 유발해 의도하는 바를 달성하고자 하였다.4)

  따라서 영국은 이러한 폭격의 정밀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Committee for the Scientific Survey of Air Offense'를 설립하고, 항법과 폭격의 정확도 개선책을 모색하였다. 여기서 나온 결론은 그 당시의 기술로는 악천후 또는 야간항법시 ’추측항법(Dead Reckoning)'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항공기를 표적반경 50마일까지 밖에 유도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밀 항법 및 폭격장비의 부재와 더불어 왜 2차 세계대전시의 도시 폭격이 정밀 점표적 공격이 아닌 지역폭격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즉, 영국 폭격기사령부는 공격해야 할 표적을 제대로 찾지도 못했으며, 찾은 경우에도 정확히 공격하지 못했고, 정확히 공격한 경우에도 충분할 정도의 폭탄을 탑재하지 못한 관계로 인하여 적정 피해를 유발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이 심각하게 노출된 것은 독일에 대항한 전략폭격 전역이 시작된 첫해에, 폭격기사령부 휘하 폭격기 중 1/3 정도만이 표적으로부터 75평방마일 이내에 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는데, 이 폭격의 효과가 보잘것없었다는 것이 판명된 다음이다. 또한 초기 항공기 탑재 레이더를 이용하는 경우라도 최소한 인구 10만 명 이하의 소도시 지역에 대한 공격은 비경제적이었다는 점이 판명된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가들이 폭격기가 의도한 효과를 유발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들 폭격기의 생산을 취하하겠다고 위협하자 폭격기사령부는 해결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1942년 2월 폭격기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취임한 아더 해리스 대장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지역폭격”을 내놓게 된다. 즉, 정부의 근본적인 정책전환에 힘입어, 특정한 공격목표를 정확하게 저격하는 정밀 조준폭격에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앞에서 상술한 근본적인 기술적 문제 외에도 정밀조준폭격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당초부터 정부가 독일의 어떤 특정목표를 공격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영국 자신이 독일 공군에게서 받은 피폭 경험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0년 11월의 독일공군에 의한 코벤트리 공습은 주로 공장에 목표가 집약되었다고는 하지만 405k㎡의 시가지역을 파괴하였다. 공장 폭격의 피해보다도 시민의 주거 및 수송기관, 수도, 전기와 같은 공공시설이 파괴됨으로써 군수 생산의 재개가 늦어지게 된 것이다.

  전쟁 수행에 있어서 시민의 사기에 대한 공격이 중대하다는 견해를 조사한 옥스퍼드 대학교 물리학교수 포웰의 통계적 분석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이 된 도시에 있어서 독일이 투하한 폭탄 1톤에 대하여 100~200명의 시민이 집을 잃었으며, 이것을 비율로 환산하면 영국 폭격기 1대가 연 14회까지 출격을 하면 4,000~8,000명의 독일시민이 “집을 잃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따라서 독일인구 중의 2200만 명이 58개 주요 도시에 집중해 있으므로 이 도시들이 1년 반 이상에 걸쳐 지역폭격을 받게 되면 영국공군은 독일 총인구의 1/3을 집이 없는 상태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독일국민의 사기를 꺾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5)

  물론 이것은 과장되고 틀린 보고서였지만 처칠 수상은 이 보고서에 매료되어 1942년 3월 최종 보고서가 제출되기 전에 지역폭격 방침을 정식으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의한 공군성의 새로운 명령은 해리스 사령관에게 독일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독일의 도시를 폭격함에 있어서 이후로는 목표지역안의 1, 2개 특정목표를 폭격하는 것이 아니라 인구밀집지역에 전력을 집중하라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목표에 대한 인식도를 높이고 목표인 거주지역 파괴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탑재 폭탄의 50%를 방화를 위한 소이탄으로 충당했다.

  따라서 이러한 지침에 따른 1943년 3월 8일 최초의 지역 폭격이 가해진 곳이 루르지방의 주요도시 에센이었다. 이곳에 대한 폭격은 실패하였으나, 3월 28일 야간의 폭격기 234대에 의한 뤼벡 폭격이 대성공을 거두자 적국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전술인 지역폭격이론은 부동의 입지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후 이러한 지역폭격에 대한 독일의 영국 5개 도시에 대한 보복 폭격과 이에 대한 5월 27일의 폭격기 1,046대를 동원한 쾰른 대공습을 통하여 완전히 영국공군 폭격기 사령부의 전술로 자리잡게 되었다.

  도시지역에 대한 지역폭격은 민간인과 비군사용 민간자산을 파괴하여 유혈의 참극을 빚음으로서 1922년 “워싱턴회의”에서 제정된 무기제한 규정의 금지를 위반한 것이다.


  다. 미 전략공군의 작전 및 전술적 배경

    영국공군과 달리 독립된 군종으로서 자리잡지 못했던 미육군 항공대에서는 192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현대항공력의 시작과 끝을 대변하는 것이 폭격기라고 믿게 되었다. 1926년 초반 항공단의 교범에는 공격받는 경우 경제활동이 종식될 정도의 ‘핵심부위’ 또는 ‘민감한 지점’이 적의 경제체제에 다수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었다. 다수의 항공장교들이 교육을 받은 Air Corps Tactical School에서는 이러한 주장에서 발전하여 적국의 산업 잠재능력을 격파하는 경우 적의 경제구조와 함께 전쟁 지속 의지가 와해될 것이라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1930년대 후반부터는 미 항공인들의 사상을 주도한 것이 폭격기 옹호자들이었다.

  이러한 교리 및 이론, 항공기술의 혁신에 따라 새로운 폭격법이 대두하게 되었다. 즉, 설계 분야의 발달로 전투기 성능보다 폭격기의 성능이 보다 빠른 속도로 발전해나가, 1930년대 중반에는 신형폭격기의 작전반경과 성능이 당시 사용중이던 전투기와 대등한 수준이 된 것이다. 따라서 항공단 이론가들은 주간에 편대를 구성하여 비행할 경우 이들 폭격기가 공격에 취약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게 되었다. 따라서 1930년대 말 미육군 항공대는 교리를 혁신하여 고고도에서 수평비행을 하며 주간에 정밀 폭격한다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개념 덕택에 2차 대전시의 미전략 폭격기 부대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당시 이러한 교리로 인해 다음과 같은 가정이 탄생하였다.

  첫째, 적의 전시경제에 핵심표적이 존재하며, 이들 표적은 규명가능하고 이들이 정밀폭격에 취약하다. 둘째, 전투기 호위가 없는 상태에서도 폭격기군단이 독일 방공망을 돌파하여 지나칠 정도의 피해없이 이들 표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일단 표적에 도달하게 되면 표적을 격파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폭격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독일의 핵심 전쟁생산 체계 전반에 걸쳐 충분할 정도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독일은 별다른 대안 없이 붕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6)

  그러나, 이러한 가정들은 실제 전투에 투입되면서, 가정 수립시의 과도한 계량화와 유럽에서의 실제 전투경험상 호위 전투기가 부재한 상태에서의 주간공습시 생존의 부재, 전투기 제작기술 발전의 과소 평가, 유럽의 기상특성 미고려 등으로 인하여 거의 패배 직전까지의 상황을 유도하는 함정으로 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공군은 주간 정밀폭격전술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따라서 제한된 야간 폭격에 대한 기술적 해결책이었던 도시 폭격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석유생산시설과 항공기 공장, 철도 등의 교통시설에 대하여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자국의 본토가 직접적으로 공격받지 않아 지휘부와 국민들의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상대적으로 덜하였으며, 따라서 정치가와 지휘부에 대한 군사적 보복의 압력이 적었다는 것도 또 다른 주요한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공군 폭격기군단은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단일 지휘부의 지시에 복종하여야 하였고 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사상과 부합되지 않는 도시지역에 대한 지역폭격에 나서게 된다.


라. 각 도시별 폭격의 배경

  (1) 함부르크

     1943년 3월 영국공군 폭격기사령부는 “독일 산업인구의 주거를 뺏고 사기를 약화시키고 가능하다면 살상으로 몰아넣는” 그들의 주임무로 집중하게 된다. 따라서 독일의 주요 산업 지대인 루우르 지방의 기능을 마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에센을 비롯한 공업지대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1943년 5월 상부의 지시로 루르 지방의 발전과 용수공급을 담당하고 있던 3개 댐을 파괴하여 공업지대를 대홍수로 일거에 파괴하고자 하였던 댐파괴 작전을 실시하게 되었다. 사실 해리스 장군은 이 작전이 지역폭격이 아닌 정밀폭격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었으나, 그의 뜻대로 이 작전이 실패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해리스 대장은 지역폭격전략의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1943년 7월에 해리스는 루르 북동쪽에 있는 독일 최대의 항구이자 제2의 도시인 함부르크에 주목하게 된다.

  해리스의 목적은 그가 선정한 작전의 암호명에 잘 나타나 있다. 암호명 ‘고모라 작전’은 사악함 때문에 불과 유황에 의해 파괴된 성서 속의 도시 고모라의 이름에 유래하고 있었다. 즉, 그는 단일지역에 대한 전력 집중으로 파괴의 극대화를 가져와 적의 사기와 도시를 파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고모라 작전은 10일 이상에 걸친 폭격작전으로서 최초로 미공군과 영국 공군이 협동하여 주야 겸행 폭격을 단일목표에 집중시켰다. 즉, 미군이 B-17과 B-24를 이용 주간에, 영국군이 랭카스터와 핼리팍스 폭격기를 이용 야간에 각각 공격하였던 것이다.

  기술적 측면에서도, 함부르크는 엘베강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새롭게 개발된 H2S 레이더 목표 탐지기로 대지와 하천의 명확한 구별을 화면에 뚜렷이 비춰 줄 수 있어서 신형탐지기로 목표를 식별하여 폭격하기 수월하다는 특성과 독일 공군의 방어용 레이다 시스템을 교란할 최초의 chaff인 window가 준비되어 있었다.


   (2) 드레스덴

      1945년 초, 연합군 폭격기는 방공망이 마비된 독일에 맹폭격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폭격의 일환으로 대규모의 융단폭격이 대도시에 가해졌다. 따라서 지금까지 폭격받지 않았던 도시들도 폭격의 목표가 되었다. 당시 인구 10만 이상의 독일 도시 대다수는 시내의 거의가 폐허화되었다.

  지역 폭격주의자인 해리스 공군대장은 1843년 초기에 폭격 개시 시에 60개 목표 도시의 일람표를 작성했었다. 그의 상관인 포털 공군참모총장은 연합군 폭격의 우선 목표인 석유 산업과 수송로 파괴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해리스는 도시폭격을 중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털과 그 밖의 상층부가 문제삼은 것은 지역폭격의 효과였을 뿐 결코 그 도의성을 문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포털 자신도 베를린 대공습 계획을 제안하여 영국과 미국 양군의 폭격기에 의한 24시간 연속폭격을 요청하고 있었다. 암호명을 "thunderclap"이라고 부른 이 작전의 목적은 독일 국민의 사기를 분쇄하고 그들을 항복시켜 평화를 요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이 계획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호위전투기를 준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계획이 보류된 것이었다.

  하지만 미공군의 스파츠 대장은 썬더클랩 작전에 반대였고 또 실제 도시폭격이라는 방법론 자체에도 불찬성이었다. 그는 도시폭격의 여파, 즉 전후에 반드시 제기될 것임에 틀림없는 비난을 받기가 싫다고 표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 영국공군의 지역폭격과 미군의 정밀폭격의 차이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고,. 악천후 때문에 목표 식별이 어려워지면 미군 폭격수들도 맹목적인 폭격방법을 취하여 영국공군이 야간에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신형 레이다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1944년의 마지막 3개월 간에 행해진 미군 폭격의 약 80%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레이다 폭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폭격은 지역 전체에 뿌려져 정유소나 철도조차장 등의 특정목표를 훨씬 벗어난 지역에까지 그 파괴력을 미쳤다. 그 결과는 평균적으로 목표에서 300m 이내에 떨어진 폭탄은 전체의 1/3도 안 되는 저조한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사정에 더하여 1945년 초에 독일이 감행한 아르덴에서의 반격이 전쟁 조기종결의 전망에 대한 연합군 측의 자신을 동요시켰기 때문에 썬더클랩 작전과 같은 결정적인 하늘로부터의 공격을 스파츠에게 요구하는 압력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즉, 독일의 동부전선 방어에 중요한 교통중심지를 파괴함으로써 소련군의 진격을 촉진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초조와 좌절의 분위기 속에서 스파츠는 마침내 평소의 태도를 버리고, 1945년 2월 3일 베를린을 향해 폭격기 1,000대를 출격시켰다. 이 공습은 철도 조차장과 그 밖의 수송기관을 노린 것이었으나 많은 폭탄이 시의 중앙에 있는 관청가에 떨어지게 되었고, 후에 스파츠는 그의 휘하의 폭격기가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여 “군사목표에 공격을 한정시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인정하였다. 이 공습으로 25000명의 시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곧 다른 도시들에 대해 더욱 강력한 맹공습이 가해지게 되었고 그 중의 한 도시가 드레스덴이었다.


2. 정치적 배경

  가. 함부르크

     함부르크의 경우는 사실 특별한 정치적 배경이 없었다. 차라리 독일의 공습에 대한 보복적 성격이었다면, 그것은 이미 1942년 3월 28일의 뤼벡 공습과 4월 23일의 로스토크 공습, 그리고 폭격기 1,046대를 일시에 동원한 동년 5월 30일의 쾰른 폭격이 그러한 성격의 것이었다. 1943년에는 이미 일정규모 이상의 독일군폭격기가 영국본토를 폭격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위에서 열거한 도시들이 피폭당한데 대한 독일의 보복이었던 ‘베데커공습’은 단지 1942년 3월부터 5월까지의 2개월 간 영국의 5개 도시가 수난을 당한 것으로 그쳤던 것이다.

  또한 1943년은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제 6군이 전멸을 당하였으며, 아프리카에서도 철수하고 연합군이 시실리 섬에 상륙하는 등 본격적으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러므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소련을 돕기 위한 제2전선의 구축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으며, 보복을 감행할만한 독일의 군사적 도발이 영국이나 미국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함부르크 공습은 단순히 영국공군의 폭격전술이었던 지역폭격전술을 당시 새로이 전열에 합류해 증강일로에 있었던 미군의 전략폭격기대와 연합하여 주야간에 걸친 지속적 폭격으로 독일의 방공망을 마비시키고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하여 루르 지방의 산업 기반을 파괴하고자 했던 순수 군사 목적의 작전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작전명 “고모라”는  숨은 뒷배경에서 영국이 자국에 대해 가해졌던 독일의 폭격에 대한 보복 성격을 감추고 있던 것 또한 사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나. 드레스덴

     영국공군 해리스대장의 폭격리스트에서는 드레스덴은 최하위에 놓여 있었다. 드레스덴은 지금까지 대규모 폭격을 면해 온 중에서는 독일 최대의 도시였다. 단 두 차례 가벼운 폭격을 받았으나 그것들은 모두 미군 폭격기가 구름때문에 제1목표인 석유시설을 발견하지 못해 부득이 목표를 바꾸어 드레스덴의 철도 조차장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밖에는 연합군 측에 별 중요성을 갖지 않았던 도시였다. 영국과 미국에는 드레스덴이 단지 문화적 시성이나 역사적 유적이 유명하고 아름다운 자기의 생산지로만 알려지고 있었다.

  동부독일의 도시를 폭격한다는 계획의 일환으로서 드레스덴 폭격을 제안한 것은 처칠 수상이었다. 처칠의 동기는 본질적으로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와 루즈벨트 대통령은 얄7)에서 스탈린과 회견하게 되어 있었다.-결국2월 13일부터 14일까지의 드레스덴 폭격은 시기적으로 타이밍을 놓치게 되었다.- 그런데 서방측의 두 수뇌는 최근의 영국과 미군의 지상전과 측면에서 스탈린에게 자랑할 것을 갖고있지 못했다. 그들은 최근 일련의 작전의 실패를 입었던 것이다. 즉, 19944년 9월 17일부터 9월 25일까지의 네덜란드 아른헴 지역에 대한 4개 공정사단과 영국군 제30군단을 동원한 마켓가든 작전이 공정부대의 손실만 17,000여명에 달하는 대실패로 끝났다. 또한 1944년 12월 16일에 시작된 발지 전투에서는, 120㎞의 전선을 따라 쐐기 모양의 대형을 갖춘 독일군이 8개 기갑사단을 앞세우고 연합군을 기습하여 지베와 디낭에 있는 뫼즈강 도하 지점에서 32㎞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도달하고, 12월 24일에는 연합군 진영 안으로 약 100㎞나 뚫고 들어와 32㎞의 전선을 형성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독일군은 1945년 1월 8~16일에 퇴각하였고, 미국군 사상자수는 7만 5,00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부전선에서는 1945년 1월 12일부터 소련의 225개 보병사단과 22개 기갑군단이 발트 해와 카르파티아 산맥 사이의 전선에서 대공세를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드레스덴 등의 도시를 맹폭하면 영․미 양국이 소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를 스탈린에게 제시할 수가 있었고, 이러한 공습은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퇴각중인 수십만의 독일군 사이에 혼란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동부전선으로의 독일군 대부대 이동까지도 방해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즉, 독일의 동부전선 방어에 중요한 교통중심지를 파괴함으로써 소련군의 진격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영․미 양군의 가공할 공군력을 스탈린에게 인식시키게도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종전 후를 대비한 얄타회담에서 서방의 두 정상이 보다 유리한 카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공군 폭격기사령부의 참모들은 드레스덴 공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근거로서는 그들이 드레스덴의 도시방어체계에 대한 정보가 부재하였으며, 표준목표지도조차도 미보유하고 있었고, 사령관인 해리스도 새로운 명령에 어리둥절했었다는 것에서 입증된다.



Ⅲ. 폭격의 진행과 결과

1. 함부르크

     1943년 7월 23일 야간, 최초의 chaff인 9200만개의 윈도우를 투하하며 740대의 폭격기가 공격을 시작하였다. 영국공군이 도버해협을 넘기 시작하면서부터, 독일공군 레이다 관제원들은 영국공군이 ‘증식’하는 것에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였고 함부르크 방공망은 마비되었다. 공격기들은 8,000톤의 폭탄을 투하하였고, 격추된 것은 12대였다.

  이틀 후인 7월 25일 미공군의 B-17이 주간에 다시 폭격하였으며, 야간에는 영국공군 폭격기 722대가 재출격하여 아직도 불타고 있던 함부르크를 재공습하하여, 지난 공습으로 수도 본관이 파괴되어 민간 방공체제의 소화능력까지 붕괴된 도시를 타격하였다. 지난 공습으로 이미 타오르고 있던 화재는 영국공군의 소이탄을 맞고 더욱 확대되었다. 열기가 상승함에 따라 냉기가 밑으로 흘러 심한 난기류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 날 밤 함부르크의 도처에서 일어난 이 대류현상에 의해 시속 240km나 되는 강풍이 발생, 나무를 송두리채 뽑아버리고 자동차를 공중으로 휘말아 날리는 대 참극이 빚어졌다. 대기온도가 980°C에 달하여 아스팔트가 끓어오르고 이미 방공호 안으로 대피한 시민들을 질식사 및 탄화시키는 부수적 효과를 발생시켰다.

<사진 1. 함부르크의 대피소 내에서 소이탄의       <사진 2. 화염의 폭풍으로 불에 타버린 공습

  불완전 연소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경계병의 시신과 자전거>

  사망한 시민들. 이 가스 중독이 소이탄으로 

  인한 사상자의 80%를 차지>


  이후에도 7월 29일과 8월 2일에도 재공습을 실시하는 등 총 9일간 4회의 야간 폭격과 3회의 주간 폭격을 실시하여 165,000발의 소이탄과 고폭탄등 총 9,000톤의 폭탄을 연 3,000대 폭격기를 투입하여 시가지 25.6㎢가 파괴하고 건물의 절반

      <사진 3. 폐허화한 함부르크 시가> 

을 붕괴 또는 파손시켰다. 이에 따라 113만명의 인구 중, 사망자는 5만5천명으로 추정되었으며, 100만의 피난민이 발생하였다. 폭격후 함부르크 인구는 23만명으로 줄었다. 이 숫자는 전쟁 개시 후 모든 독일군의 공습으로 사망한 영국인 수와 거의 맞먹는 숫자였다.

  이 함부르크 대공습에 대한 소문은 독일 전국으로 퍼져나가 독일국민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데에는 기여했지만 결정적 국면의 전환을 가져올만한 효과는 없었다.

  이러한 함부르크의 대공습에 대해 히틀러는 외  면하였다. 그러나 군수장관 알프레드 쉬페어는 그 중요성과 심각성을 깨닫고, 히틀러에게 43년 8월 1일, 장차 독일의 6개 주요 도시가 이러한 일련의 공격을 받을 경우 독일 군수산업은 전면적으로 마비되고 말 것이라고 솔직한 전망을 이야기했으나 경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군사령관 괴링은 대참사에 대해 냉담하게 대했으나,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전투기 생산을 전년대비 2배인 월 1000대 이상으로 증산하고 본토방위를 위해 러시아 전선 및 지중해 전선의 지상부대 지원용 항공기와 노련한 조종사를 차출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 지시는 히틀러의 승인 거부로 폐기되고 오히려 공격으로 맞설 것을 명령받게 되었다. 따라서 필수불가결하고 긴급한 방공망 강화에 투입되어야 할 시간과 물자가 JU-188과 HE177 신형폭격기 및 Me-262 제트 전투기의 폭격기 개조 생산과 부대 준비에 착수하는데 투입되어 독일공군이 효율적으로 연합군의 전략폭격에 맞설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독일 공군은 기존 방공체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독일 공군에게 찾아온 최후의 기회를 앗아감과 동시에 독일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2. 드레스덴

  1945년 2월 13일과 14일 영․미 폭격기가 베를린 남방 160km에 있는 드레스덴을 공습하였다. 드레스덴의 파괴는 항공전의 최종단계에 수개월간에 있어서 공폭의 공포와 잔인성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사건이 되었다.

  2월 13일 밤. 영국공군 랑카스터기 2개 제파가 공습을 가하기 시작했다. 제1파는 234대로 구성되어 17분간 폭격을 실시하였으며, 3시간뒤 538대로 구성된 제2파가 도착하여 번지고 있는 화재지역의 주변부에 폭격을 가하였다. 영국폭격기는 총 2556톤의 폭탄을 투하하였는데, 폭탄의 70%가 소이탄이었다. 따라서, 모든 방공호와 지하실까지도 540°C까지 상승하였다.

             

<사진 4. 드레스덴 공습으로 인한 시신들을 소각하는 장면. 당시 사망자들은 질병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하여 죽은 현장에서 화장되었음>


  이러한 폭탄 비율은 불타기 쉬운 목조가옥이 많은 오래된 도시를 공격할 때의 표준무장 탑재방식이었다. 영국공군 공습 10시간 뒤 미군이 공습을 시작하였다. 정오 직후에 B-17 311대가 레이다 조준 폭격을 감행하여, 철도역과 조차장에 771톤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드레스덴 공습이 큰 참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불행한 우연이 겹쳐진 결과였다. 독일공군과 대공포에 의한 반격은 거의 없었다. 고사포는 전달에 철거되어 동부전선에 보내진 상태였고, Me-110 야간전투기 부대가 8KM 거리의 기지에 있었으나 연료부족이 심각하여 사단사령부의 허가없이는 이륙이 금지되어 있었다. 기상도 보기 드물게 맑았다. 따라서 영국공군 야간폭격기대는 정확하게 폭탄을 집중투하하는데 성공하였다. 가장 중요하고 비참한 것은 드레스덴 시당국과 정부의 책임자 누구도 이러한 규모의 공습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콘크리트 엄폐호는 단 1개로 지방장관 전용이었다. 드레스덴 관리들과 시민들은 전후 연합군이 독일의 수도를 드레스덴으로 옮길 것, 또는 처칠의 친척이 살고 있다는 등의 헛소문으로 폭격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여기에 가중하여 동부전선에서 온 피난민으로 인구가 63만에서 100만을 웃도는 수준으로 급격히 팽창하였고 대다수가 공습을 미경험했었다.

        

<사진 5, 6. 좌측은 공습 전의 드레스덴의 상징인 프라우덴 성당의 모습, 우측은 공습으로 90m 돔이 붕괴된 후의 모습. 성당은 직접 폭격받지 않았으나, 매우 높은 주위 온도로 인하여 자연발화를 일으켰음. 이때 성당 지하실에 보관중이던 독일공군의 셀룰로이드 필름이 인화되어 폭발적인 화재가 발생하여 파괴됨.>

<사진 7. 시청사 옥상에서 바라본 폭격 후의 드레스덴 시가지>

  영국공군이 폭격한 뒤 1시간도 지나기 전에 최악의 화재가 발생하여 1주일간 화재가 지속되었다. 이 화재는 각각 다른 지점에서 발생한 무수한 화재가 합류하여 1943년 7월에 영공군이 함부르크에서 발생시킨 것과 같은 폭풍을 동반한 화재선풍을 발생시켰다. 이 화재로 舊市街 전체 면적 6.5㎢가 화재에 휩쓸렸으며, 불길은 무서운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지상의 모든 것과 지하로 피난한 사람들까지 살상했다.

 이 폭격의 희생자 수는 최초 발표에서는 250,000명이라고  나왔으며, 사고 후의 조사에서는 135,000명으로, 후일 연합군에 의한 발표에서는 38,000명으로 줄었다.

  이것은 1943년 함부르크의 희생자 수보다 적은 숫자이다. 그러나 당초 발표추정치나 전례없이 과격한 독일 선전방송의 소동에 의해 드레스덴의 비극은 폭주한 공군력의 무서움을 말해주는 사건으로 영원히 전해지게 되었으며, 당시 혼란상으로 인하여 정확한 사망자 수는 누구도 모른다.


Ⅳ. 폭격의 의의와 파급 효과

1. 연합국의 폭격 당위성 고찰

   연합국의 함부르크와 드레스덴 폭격의 당위성 고찰은 2차 대전 전기간을 관통하는 연합군 공군의 사상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함부르크와 드레스덴에 대한 폭격은 단지 그 당시 수행되었던 도시지역에 대한 전략폭격 중 특히 그 참상이 심한 것일 뿐 별도로 독립된 뚜렷한 동기와 작전적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국의 Tedder 경은 지역폭격을 채택한 세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독일의 군수생산이 1942년에 이미 한계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폭격의 피해로서도 군수생산에 영향을 줄 수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 점에서 일반 생산공장이나, 발전소8), 공공시설 등 물자적인 것에 가해진 피해는 주거를 잃은 노농자의 생산의욕이나 노동력 저하와 비례하며 독일 전체의 생산을 극도로 저하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실제 군수생산량은 1/3 또는 그 이상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였다. 둘째, 개별목표에 대한 야간폭격은 그 당시의 조준기와 항공장비의 기술수준으로써는 달이 밝은 기상상태가 양호한 밤에만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정 하에서 공격가능한 회수는 계절과 기상의 영향을 받아 많이 제한되었다. 또한 月下에 실시하는 야간폭격은 독일 야간전투기에 의한 피해를 증대시켰다. 셋째로, 독일공군이 영국본토 항공결전말기에 런던 폭격을 실시할 때, 순수 군사적 목표가 아닌 것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인 요구 앞에서 도의적 고려는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해도 좋다는 결심을 쉽게 하도록 만들었다.”9)

  따라서, 저조한 폭격명중률에 대한 경제적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도시 중심부의 겨냥과 최대한의 폭탄량이 특정부분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제한점 때문에 戰域은 공격자가 지역폭격을 통해서 실질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실시되었다. 사실 지역폭격은 “심리전”의 일부인 민간인의 사기와 관련된 중요한 취약점에 대한 두헤의 이론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폭격의 효과와 효용성 고찰

  전략 폭격 특히 지역폭격의 효과는 전략폭격의 목표를 얼마나 달성할 수 있었을까? 제 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에 국한해서만 보자면 이에 대한 대답은 아주 부정적이다. 물론 폭격 부대로서는 시현 효과와 폭격의 용이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막대한 노력의 낭비였다. 물론 변화가 심한 독일의 기상과 영국공군이 야간 폭격전력으로서 건설되었고, 그 당시의 기술적 한계가 있다는 것을 위에서 살펴보았다.

  도시 폭격은 적국민의 사기를 꺾어 적의 전쟁 수행의지를 말살하고 적의 산업 시설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발생한 어떠한 사기저하도 전체적인 전략적 상황에는 부분적인 효과밖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이 지역폭격의 사례로서 입증이 되었다. 독일의 도시 지역에 소재한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그 도시에 집결되어 있던 전쟁산업체들은 약간의 생산력 상실이나 생산량 감소밖에 없었다. 반면 이러한 도시폭격에 소모된 폭탄의 양은 엄청난 규모로 1943년 후반기부터의 석유 생산시설을 공격하기 이전에 독일에 투하된 폭탄양의 53%는 지역표적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그중 겨우 13%만이 특정산업을 겨냥한 것이었다. 심지어 석유생산시설에 대한 공격기간 중의 투하량 150만 톤의 27% 이상이 도시를 겨냥하였고 22%만이 특정산업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외형적으로는 완전히 파괴된 도시가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독일에서의 도시 폭격이 일본과는 다르게 이처럼 실패하게 되었던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 뚜렷한 것은 대부분의 독일 도시에 있어서 산업단지는 도시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과거에 폭격을 받지 않은 도시에 대한 지역폭격은 언제나 도시 중심부를 목표로 하였다는 것이었다.

  비록 1943년과 1944년 사이에 맹목폭격 보조장비가 급격하게 발달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건물 밀집지역에서 산업시설을 대상으로 폭격을 집중시키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산업시설을 명중시켰을 경우에라도 생활필수품은 물론 비필수품의 생산에도 차질을 초래하였는데, 오히려 이런 비필수품에 대한 생산의 중단은 생필품 산업으로 노동력과 자원의 유입속도를 증대시키는 효과를 낳은 것이다. 강력한 폭격으로 인하여 전기, 가스 수도 등의 공급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어도 대부분 즉시 복원되었다. 또한 생활 필수품의 보급을 상당량 불가피하게 감소시킨 폭격이 동시에 그 수요자들도 상당수 감소시켰다는 사실도 잊으면 안된다.

  도시 폭격의 효과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그 피해가 건물 내에 설치되어 있던 기계나 공구보다는 주로 건물에 대한 피해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독일이 보유하고 있는 산업 기계류 중 공습에 의해 손상되거나 파괴된 비율은 겨우 6~7%에 불과하였으며, 그나마 그 중의 일부는 교체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강력한 폭격을 실시했던 1944년에도 공습에 의해서 손상된 기계류의 복구를 위해 전체 기계류 생산량의 단지 10~12%면 충분했던 것으로 추산된다.10) 만약, 전시생산에 매우 중요한 기계가 설치되었던 건물들이 매우 심한 피해를 입었을 경우에는 그 기계를 종종 다른 장소로 이동시켰다.

  물론 전체적인 전시생산에 준 피해가 하찮은 것은 아니었다. 지역폭격은 폭격이 있은 후 한달 동안 그 도시의 월 생산량의 55%를 감소시키고 노동자들의 장기 결근사태를 유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속한 복구로 인하여 대부분의 도시들은 3개월 이내에 80% 정도 복구되었고, 6~11개월 이내에 완전히 원상 복구되었다.11)

  1943년의 함부르크 폭격은 연합국 측에 미친 영향보다는 독일 측에 미친 영향이 더 크다. 즉, 연합국 측에는 전략 폭격전술, 즉 지역 폭격 전술의 효용성을 또다시 증명해 준 것에 불과했다. 반면, 독일 측으로서는 만일 이와 같은 폭격공세가 거의 동시에 지속적으로 독일의 다른 도시들에 대해 수행된다면, 더 이상 본토의 산업시설과 도시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으며, 일반 독일 시민들에게 연합군 폭격기대의 위력과 공포를 각인시켰다.

  그러나 엄청난 횟수의 도시 폭격이 가해진 1942년 1월부터 1944년 8월까지의 독일의 탄약 생산 지수는 100에서 322로 지속적으로 증대되었다. 독일의 도시에 대한 폭격은 독일인들에게 더 많은 생산부담과 거주지의 파괴, 더 많은 군사자원의 방어 임무로의 전환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류의 전쟁물자에 대한 큰 부족도 발견할 수 없었다. 독일의 군수산업과 군 보급체제를 마비시킨 것은 도시폭격이 아닌 석유산업과 교통집하 시설에 대한 전략폭격이었다.

  그러나 드레스덴 폭격의 효과는 달랐다. 먼저, 드레스덴 폭격의 당시에는 이미 독일 내부의 주목할 만한 산업시설과 위력을 가진 병력이 없었다. 따라서 함부르크 공습시에는 적의 전쟁수행능력을 파괴한다는 당위성이 있었지만, 드레스덴 폭격은 사실 불필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공습 후 많은 미국과 영국인은 연합군의 폭격이 반드시 정부가 선전해 온 것처럼 군사목표와 산업시설에만 돌려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1945년 2월 19일 AP 통신은 "연합군 공군수뇌부가 히틀러의 멸망을 촉진시키기 위한 가차없는 수단으로서 독일의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의도적인 테러폭격을 감행하기로 했다"고 보도하였다. 사실 이 보도는 결단이 새로운 것이라고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정확한 보도였다. 실제로 연합군 수뇌부는 “테러 폭격”이라는 용어에는 주춤하였으나 무차별 폭격은 그 무렵 이미 낯선 이야기는 아니었다.

  3월 28일 처칠은 포털 공군참모총장에게 보내는 각서에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구실은 어떻든 단순히 공포를 증대시키기 위해 독일을 폭격한다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재고할 때가 왔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완전한 폐허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들은 독일산의 주택자재를 우리나라 자신의 필요를 위해 입수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장의 공급은 그들 독일인 자신을 위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12)

  전쟁에서 적에게 불편과 불행을 주는 것이 합리적인 군사적 목표이기는 하지만 두헤와 트렌챠트의 이론을 따랐던 아더 해리스와 장병들이 한 약속의 관점에서나 그리고 도시폭격에 투입된 막대한 군사자원을 고려할 때 2차대전에서의 도시지역 폭격은 실패한 것이다.

  또한 이미 도시지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은 1942년에 해리스 공군대장이 무차별 폭격의 수행을 인계하기 전에 이 방침을 내놓은 처칠, 포털, 그 밖의 참모에 있어서는 이미 종전 후를 고려한 정치적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증거가 영국 정부가 전쟁의 종결에 즈음하여 숱한 훈장을 수여시 해리스와 영국 공군 폭격기 병단을 제외시킨 것이다.



Ⅴ. 결   론

   1945년 4월 25일 베르히테스가르텐의 히틀러 산장을 폭격한 영국공군 랑카스터 318대가 연합군 폭격기의 마지막 작전 부대였다. 이미 4월 초 공격목표가 거의 없어진 상태였고 4월 16일 엘베강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합류함에 따라 영국과 미국의 전략 폭격은 공식으로 종결되었다.

  전쟁기간 중 미군 79,265명, 영국군 79,281명 총 16만여명의 연합국 폭격기 승무원들이 전사했다.  독일공군의 희생자 수는 미확인이다. 하지만 폭격으로 305,000여명의 독일 시민을 살육한 도의성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논쟁의 불씨로 남아있다. 항공전력만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간다고 예언한 초기 예언자들의 주장을 폭격기는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독일을 석권한 지상군의 업적은 연합군의 전략 폭격이 이룩한 파괴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종전 후 미전략폭격조사단(USSBS : The 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의 유럽지역 연합군 전략폭격에 대한 조사 결론으로도 입증이 된다.

  첫째, 미영의 연합전략폭격이 독일의 전쟁 경제력을 붕괴시켰다. 둘째, 그 결과가 전쟁말기에 나타나 이미 결정적 순간에 도달하고 있는 지상 및 해상전력에 충분한 영향력을 제공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셋째, 실제로 항공력은 연합군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전략 폭격의 능력과 특히 보다 현명한 표적선정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폭격에 의한 긍정적 결과를 훨씬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여기서 전략 폭격의 효용성을 입증하면서 또한 도시폭격(지역폭격)의 무효과와 전력의 분산 또한 같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함부르크와 드레스덴에 대한 폭격은 잘못된 전략 개념과 군사기술과 장비의 한계, 자국의 피해를 피로써 보상받고자 하는 단순한 적개심, 전후 발언권 확보라는 정치적 고려와 전체 전역에서의 두 도시의 기능과 역할 등에 대한 오판이 혼합되어 수행되어진 도시폭격이며, 이것은 인간과 특정국가가 윤리의식과 文明度와 상관없이 전쟁의 과정에서 얼마나 야만적이 될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종전 후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국제재판이 개최된 최초의 전쟁이다. 그러나, 이 법정에서도 무고한 민간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처칠 수상과 해리스 폭격사령관, 스파츠 미군 사령관등이 재판정에 서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승자였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먼저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승자에 의해 재단되는 윤리와 법... 그것은 고대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을 정당화하는 법과 다름이 없었다.

  함부르크와 드레스덴에 가해졌던 폭격, 그리고 코벤트리, 런던, 쾰른, 베를린, 히로시마, 나가사끼, 중경, 기타 수많은 도시들은 역설적으로 국방의 중요성과 전쟁의 참혹성과 야만성, 그리고 전쟁 방지를 위한 평시 억제 전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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